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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댕이의 문화 & 금융 이야기 -
[서평] "그 남자는 왜 이상해졌을까?" -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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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책 : "그 남자는 왜 이상해졌을까?" / 오찬호 저 / 동양북스
다 읽은 날짜 : 2017년 3월 23일, 지면
서평 작성일 : 2017년 3월 25일 토요일, 왕십리, Arigatto 2호점 / 3월 26일 일요일, 집
<읽게 된 동기>
STEW 독서모임 두 번째 지정도서. 최근 페미니즘이 큰 화두인데, 이번 지정도서로 페미니즘 관련 도서가 선정되어 굉장히 큰 기대를 안고 읽게 되었다.
<한줄평 및 별점> ★★☆☆☆ ( 2점 / 5점 )
내가 남자라 그런지 공감이 안 되는 부분들이 너무 많았고 특히 억지주장(?)이라고 느껴지는 부분이 너무 많았다. 사회구조적으로 형성된 한국 남성들의 문제점이나 젠더 권력에 대해 비판하고자 하는 의도는 알겠으나 본인의 경험이나 단편적인 사실들을 당연하다는 듯이 이야기하는 부분들은 너무 읽기 거북했다. 나도 어쩔 수 없는 한국 남자인걸까?
<서평>
최근 페미니즘이 굉장히 큰 화두다. 소위 “일베”라 불리는 “일간베스트”라는 포털에서 “삼일한 - 여자는 삼일에 한 번씩 맞아야 한다” 등과 같은 여혐 용어가 유행하기 시작하더니, 이에 대항하는 “메갈리아”라는 포털이 등장 하여 “미러링”이라는 새로운 기법으로 일베와 똑같은 기법으로 남성 혐오를 조장하고 있다. 이 와중에 “강남역 살인사건”이 터지고, 본격적으로 남성 vs 여성의 대립구도가 형성되어 최근에는 심심찮게 김치녀, 된장녀, 한남충, 씹치남 등과 같은 용어들을 각종 포털에서 볼 수 있다.
나는 페미니즘을 제대로 공부해본 적이 없지만, 적어도 페미니즘이 그 동안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핍박 받고 억압받아온 사회구조에 맞서 싸워 진정한 성 평등을 이룩하자는 운동 정도는 알고 있다. 또한 나 역시 이러한 생각에 동의하고 있으며, 실제로 우리나라에 만연한 여혐 정서에 반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반대로 오늘날 너희들이 하는 것과 똑같이 돌려서 보여주겠다는 “미러링”이라는 방식을 통한 남혐 역시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미러링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들 주장한다.
“우리가 좋은 말로 할 땐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이렇게라도 해야 남자들이 사태의 심각성을 안다.”
어느정도 공감이 간다. 아니, 사실 “공감”이라는 표현 그 자체가 여성들의 입장에서는 내가 굉장히 사치를 부리는 것 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나는 남자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여성들이 겪는 차별과 고통을 절대 알 수 없다. 따라서 내가 이해한다, 공감한다는 말 자체가 마치 백인이 흑인을 보고 “흑인이라 힘들지? 내가 다 이해한다”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실제로 최근 한남충, 씹치남 등과 같은 용어가 등장하자 과거에 언론에서까지 자주 다루던 김치녀, 된장녀와 같은 단어들이 사라졌으니 실제로 메갈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효과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는 없는법. 그 효과가 있더라도 메갈리아나 워마드 등과 같은 일부 포털 등을 중심으로 퍼지고 있는 미러링은 일베에서 행해지는 여혐과 다를 바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나라 남성들에게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다. 그 동안 수많은 여혐용어들에 대해 묵인해왔던 건 나를 포함한 우리 남성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서론이 길어졌는데, 아무튼 책을 접하기 전에 이런 현상들을 보면서 최근에 페미니즘에 대하여 부쩍 관심이 늘어있던 상태였다. 그리고 그 동안 내가 의식을 못 해서 그렇지 우리 사회에서 단지 “남성”이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것들이 정말 많다는 것을 느꼈다. 이러한 생각은 최근 벌어진 “#이게_여성의_자취방이다”라는 운동을 보면서 더 확고해졌는데 이 운동은, 한 남성 작가가 여성의 자취방을 성적 판타지 대상으로 표현하자 이에 대항하는 여성들이 이를 비판하기 위하여 벌인 해쉬태그 운동이다. 여성 혼자 자취하면서 벌어졌던 수많은 일들이 이 해쉬태그를 통해 올라온다. 배달을 시킬 때 여자혼자 집에 있다는 사실이 배달원에게 알려지는게 두려워 남자 신발을 현관에 놓는다든지, 배달원에게 그냥 문 앞에 두고 가달라고 한다든지, 편의점 픽업을 맡긴다든지, 또한 밤에 자취방의 문을 따려고 시도하는 소리가 들린다든지… 정말 나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들을 여성들이 겪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사건은 이렇다.
한 여성이 집에 있는데 한밤중에 어떤 남자가 문을 두드리며 불이 났다고 피해야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소리를 듣자마자 놀라서 짐을 챙기다가 보니, 불이난 것 치고는 생각보다 주변 상황이 조용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상하게 생각하고 그냥 무시를 하였는데, 다음날 알고 보니 역시 불을 났다는 건 거짓말이었다고 한다.
만약 여자가 문을 열고 나갔다면 어떻게 되었을 지는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이렇듯, 내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여성들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성적 대상이 되고 수많은 범죄에 떨고 있었다. 해쉬태그를 달고 올라오는 수많은 일화들을 읽으며, 남성들이 언론을 통해 접하는 유리천장 지수나 성평등 지수 등에서 나타나지 않는 수많은 부분들에서 여성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내가 한국에서 남자로 살아왔기 때문에 내가 여성들에 대해 모르는 것들이나 나도 모르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여러 선입견들이 있을까봐 최대한 객관적으로 읽고자 노력하였다. 더군다나 이 책은 병장으로 만기 전역한 군필자가 쓴 책이라고 하여 책을 읽기 전 부터 큰 기대가 되었다. 같은 남성이기 때문에 여성이 쓴 책보다 훨씬 더 공감이 갈 것이고, 거기에 군대까지 다녀온 사람이 직접 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통하는 부분이 많을 것이라 생각을 하였다. 하지만, 책은 내 기대와는 다르게 본인의 개인적인 경험이나 단편적인 사실에 의존한 굉장히 편향적인 책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역시 나는 한국 남성인걸까? 20년이 넘도록 오로지 한국에서만 자랐고, 저자가 그렇게 비판하는 해병대에서 21개월 동안 복무하였기 때문에 내가 사고하는 프레임 자체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 스스로가 최대한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생각한다고 생각해도, 20여년이 넘게 길들여져온 사고의 프레임에 갖혀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책에서 한국 남성들의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니, 나도 모르게 방어기제가 작용하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앞서 밝혔듯이, 내 나름대로는 비판을 받아들일 준비를 한 상태에서 최대한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 노력했음에도 불편한 부분이 너무 많았다.
책은 시작부터 불안했다. 책의 앞 부분에는 “서민”이라는 기생충학 박사가 쓴 추천사가 있었는데, 추천사 부터 삐그덕거렸다. “게다가 2년 동안 군대에 갔다 왔다는 것을 빌미로 집안일을 전혀 안 한다는 건 좀 너무하지 않습니까?”와 같은 말들이나,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 마스크를 쓴 채 추모 현장에 나타나 ‘남자를 잠재적 가해자로 몰지 마라’는 황당한 구호를 외치는 남성의 모습은 외려 한국 남성의 문제점이 심각하다는 것을 드러내줬지요" 등인데, 전자는 과거 조선시대 때부터 내려온 가부장적인 사회구조로 인한 현상을, 또 후자는 피해자에 대한 추모 현장을 “남자를 잠재적 가해자로 몰고 가는 현장”이라고 이상하게 해석하는 개인의 문제를 마치 우리나라 전체 남성들이 문제가 있는 것 처럼 “일반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화”. 굳이 따옴표를 친 이유는, 현재 여성과 남성들이 가장 대립해서 싸우고 있는 문제가 바로 이 “일반화”이기 때문이다. 최근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면서, 각종 SNS에 우리나라 남성들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글들이 많이 올라오는데 이러한 글들에는 꼭 “우리나라 남성들 전체가 그렇다는 것처럼 일반화 하지 말라”라는 남성들의 반박 댓글이 달린다. “일반화”라는 댓글이 달리면 그때부터 여성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일반화가 아니라는 주장을 펼치고, 여기에 대해 남성들은 또 반박 댓글을 단다. “일반화”라는 댓글이 달리면 그때부터 전쟁 시작이다. 그래서 사실 이런 이야기를 하는게 더더욱 조심스럽지만, 그래도 앞서 내가 언급한 부분은 아무리 생각해도 “일반화”가 맞는 것 같다.
아무튼, 추천사는 뭐 저자의 이야기가 아니니까 논외로 치더라도, 본문에서도 공감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았다. 책은 우리나라에서 남성과 여성이 가장 크게 대립하는 부분인 출산과 군대에 대한 문제로 시작한다. 저자가 부인의 출산과정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며 느낀 감정들을 블로그에 올렸는데, 여기에 대해 우리나라 남성들이 온갖 욕설과 조롱을 했다고 한다. 그 이유인즉슨, 저자가 블로그 마지막에 옆에서 아내의 40시간 정도의 출산 과정을 지켜보니 내 26개월 간의 군대 생활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라는 뉘앙스의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고 한다.
사실 우리나라 남성들에게 “군대”를 무시하는 발언을 하는 건 나랑 싸우자는 말과 다름이 없다. 원하든 원치않든 20대의 꽃같은 시간 중 무려 21개월이나 나라를 위해 봉사 했는데, 이를 폄하하는 건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 EBS의 모 강사가 “군대는 사람 죽이는 걸 배우는 곳”이라고 깎아 내릴 때나, “군 가산점제를 폐지해라” 등의 이야기가 나오면 발끈한 것이다. 하지만 군대는 딱 거기까지다. 나라를 위해 21개월 간 봉사를 했고, 그에 대해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이야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군대 갔다 왔다”라는 사실만 가지고 유세를 떠는 남자들은 분명 잘못되었다. 특히나 여성들의 출산과 비교하며 출산을 깎아 내리며 군대 갔다 온 울분을 여성들에게 푸는 건 당연히 잘못되었고, 이를 비판하는 저자의 생각에도 전적으로 동감을 한다. 더불어 같은 시험을 치는 여성들을 차별하는 “군 가산점제” 역시 당연히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외에도 저자가 여러 부분에 걸쳐 이야기하는 군대 이야기에도 대부분 동의를 하며 읽었다. 가령 군대라는 환경 때문에 평범한 남성이 괴물이 된다는 것, 군대가 폭력에 관대하다는 것, 군대 내의 폭력은 반드시 근절되어야 한다는 것, 전역자들의 이중적인 행태 등 대부분이 내 생각과 일치한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군대”에 대해 비판하는 이야기만 나오면 출산과 비교하며 여성들에게 욕을 하는 남자들이 많다는 사실에도 공감을 한다. 하지만 저자는 한국 남자들이 군대를 갔다왔다는 이유만으로 사회적으로 어떤 프리미엄을 얻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병장”들은 쓸모없는 존재이니 복무기간을 줄여도 된다는 이야기, 병영 체험에 대한 이야기 등은 아무리 생각해도 내 사고방식으로는 동의할 수 없다.
먼저, 남성들이 군대를 갔다와 어떤 프리미엄을 얻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는데 도대체 무슨 프리미엄을 얻을 수 있다는 건지 모르겠다. 저자가 예로 든 교수의 이야기나 장인의 이야기는 "군대" 때문에 얻어졌다기 보다는 같은 경험을 공유했다는 부분에서 얻어진 부분이 더 크다. 아마 우리나라 남자들에게 군대 다시 갔다올래? 라고 물어보면 아마 100에 100은 No라고 답할 것이다. 만약 저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무언가 프리미엄이 있다면 군대를 다시 가겠다고 답하는 사람이 있겠지. 물론 이런 이야기를 한 취지가 남성들이 군대를 대하는 이중적인 태도 때문이라는 건 안다. 군대에서 엄청난 것을 배웠다고 말하는 한편 어쩔 수 없이 끌려 갔다고 나라가 보상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중적인 태도. 하지만 나는 이 태도가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지 모르겠다. 그들이 무슨 주장을 하든 21개월 간 나라를 위해 봉사를 했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따라서 그가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든 말든 21개월에 대해 보상해달라고 말할 권리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군 가산점제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헌재의 판결 결과와 같이 해당 시험을 보는 다른 누군가를 차별하는 방식은 분명 잘못되었다.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군대에 대한 보상은 더 많은 예비역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이 가고, 다른 누군가에게 차별이 되지 않는 범위 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병장에 대한 이야기 역시 적어도 나는 동의할 수가 없다. 내가 군대에 있을 때 병장 선임들의 모습은 저자가 말한 것처럼 작업을 내빼기 일쑤고, 뭐든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쓸모없는 존재들이냐?라고 묻는다면 단연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병장은 분명 그들만의 역할이 있다. 개인의 차가 있겠지만 적어도 내가 본 병장들은 생활반의 최고참으로서 생활반을 잘 이끌었고, 작업이나 훈련에 있어서도 일이병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높은 효율을 보였다. 내가 근무했던 곳에서는, 새벽에도 실상황 전투배치를 붙는 경우가 많았는데 실상황에서는 병장들이 더욱 엄격하게 일이병들을 통제하였다. 이처럼 적어도 나와 생활했던 병장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본분에 충실했으며, 상병과는 다른 분명한 그들만의 역할이 있었다. 최근 군대에서 여러 문제가 불거지자 계급별 생활반을 시행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행군을 준비하는 당시 아무도 군장을 쌀 줄 몰라 난처했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은 적이 있다. 이병, 일병, 상병, 병장들은 그들만의 역할이 있다. 이러한 역할을 무시한채 저자는 본인만의 경험을 내세워 병장들이 마치 쓸모없는 것 처럼 이야기 하고, 군생활을 줄여도 되는데 우리나라 남성들의 이기심이나 이중성 때문에 군생활이 줄지 않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건 동의할 수 없다.
다음으로 병영체험 역시 “군대 정신”을 강조한다며 문제점을 제기하였는데, 사실 잘 모르겠다. 병영체험을 직접 체험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잘은 모르겠지만, 병영체험의 목적은 협동심을 기르고 강인한 정신력을 기르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병영체험이 의무교육으로 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정부차원의 "권장" 체험학습 정도라 개개인의 선택에 달려있는 문제인데, 왜 여기에 문제제기를 하는 지 모르겠다. 해병대 캠프에서 훈련을 받던 교육생들이 죽은 건, 그 교관들의 부주의 때문인데 마치 병영체험 자체가 문제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 역시 동의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가장 거부감이 들었던 부분은 바로 “김치녀”, “된장녀”, “맘충”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면서 “개저씨”를 정당화 한 부분이다. 책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김치녀, 된장녀, 맘충 등을 언급하면서 내게 "너는 그런 단어들에는 입에 거품을 물면서 호명된 이들을 보호해주더니 왜 개저씨는 그렇게 호명하는 이들의 편에 서냐?"면서 타박을 준다. 그럴 수밖에 없다. 모든 아저씨를 개저씨라 한다면 문제지만 개 같은 아저씨를 개저씨라고 표현하는 건 일종의 혁명이다. 없었던 존재를 악의적으로 지어낸 것이 아니라 원래 악랄한 것을 이제야 발견했기 때문이다. 꽃을 이제야 꽃이라, 아니 똥을 이제야 똥이라 부른 셈이다. 개저씨는 '신조어'일 뿐이지 새로운 인간의 등장을 뜻하지는 않는다. 개저씨는 김치녀, 된장녀, 맘충과는 성격이 완전 다르다. 이 용어들은 주로 약자를 향한 강자들의 낙인이다. 하지만 개저씨는 정반대다. 오랫동안 짓눌린 자들의 미세한 저항이 모이고 모인 이유 있는 반항이다.
어이가 없다. 모든 아저씨를 개저씨라 한다면 문제지만 개 같은 아저씨를 개저씨라고 표현하는 건 일종의 혁명이다라고? 이를 바꿔말하면 모든 여성들을 된장녀라고 한다면 문제지만, 속물적인 여성들을 된장녀라고 표현하는 것 역시 혁명아닌가? 이 말이 맞다면, 실제로 김치녀, 된장녀, 맘충에 대하여 모든 여성들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러한 행동들을 하는 여성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라고 하면 이 말 역시 맞는 말이 된다. 김치녀, 된장녀, 맘충, 개저씨 모두 잘못된 것인데, 한쪽은 강자들이 약자를 향해 하는 말이라 잘못되었고, 다른 한쪽은 약자가 강자에게 반항하는 것이니 괜찮다고 정당화 하는 건 굉장히 모순적이다. 더군다나 저자는 책 서두에서 분명 여성과 남성을 약자와 강자로 프레임화 시키는 것 부터가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에서는 본인 스스로가 여성들을 약자라고 프레임화 시키고 있다. 굉장히 이중적이다.
물론, 저자가 말하는 소위 "개저씨"들의 잘못이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또한 저자가 말한 것처럼, 아저씨들 대부분이 안하무인에, 여성들을 무시한다는 점에도 공감을 한다. 하지만 개저씨라는 용어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절대 동의할 수가 없었다. 해당 챕터가 끝날 때는 더 가관이다.
"이분들이 살아생전 다시 오지 않을 변화의 기회를 놓치지 않길 바란다. '개저씨'란 말은 너무나도 친절한 사회적 계시다."
이외에도 위안부와 라이따이한을 동급으로 놓는 부분이나 서양의 그림을 해석하는 부분, 논개에 대한 이야기, 이모, 딸바보, 노키즈존의 카페에 대한 이야기 등등 내가 납득할 수 없는 부분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책 전체적으로 개인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고, 억지 주장(?)을 펼친다는 느낌을 받은 부분이 많아 다른 좋은 얘기들도 마이너스가 되는 것 같다. 우리나라 한국 남성들이 문제가 있다는 사실은 나도 분명히 인정하지만, 이런식의 편향적인 “한국 남자들은 잘못되었다”라는 말에는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든다. 그래서 이 책이 더 아쉽다. 남자가 같은 남자를 비판하는 만큼 다른 남성들의 충분한 공감대를 살 수 있었을 것인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더욱 아쉬운건, 책의 대부분의 내용들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내용들이었다는 데 있다.
"남자라면 '사람 문제'가 되고 여자라면 '여성 문제'가 된다."나, "김여사"에 대한 이야기, 남자는 회식과 출장, 잔업, 야근을 해도 아버지의 위치가 달라지지 않지만, 결혼한 여자는 회식, 출장, 잔업, 야근 등 회사에서 요구하는 인재가 되는 순간 가정에서 부족한 엄마, 부족한 주부, 거기에 플러스 동료들에게 기가 센 여자라는 소리를 듣게된다는 이야기 등등을 읽으면서 구구절절 공감을 하며 읽었다. 읽으면서 나 자신을 많이 돌아보게 되었고, 나중에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라는 다짐을 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좋은 내용들과 소스들을 가지고, 아쉽게 풀어낸 것 같아 기대에 비해 너무 아쉬운 책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분명 나도 모르게 생긴 사고의 프레임으로 인하여 잘못 보고 있을 수도 있다. 사실 그게 정말 두렵다. 이 글을 쓰며 서평을 되돌아보니 결국 저자가 말하고자하는 핵심에는 한 마디 반박도 못한 채 남성으로서의 방어기제가 작동하여 곁가지에 대해서만 비판을 했다는 느낌이 들기도한다(ㅎ....). 그럼에도 이런 이야기를 듣고 안듣고는 차이가 클 것이라 생각한다. 어쨌든 이 책은 내게 한국에서 자라온 나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우리 남성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여성들의 이야기에 지금보다 훨씬 더 경청해야겠다는 생각을 품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굉장히 의미가 있었던 시간이었다.
<인상 깊은 문구>
"게다가 2년 동안 군대에 갔다 왔다는 것을 빌미로 집안일을 전혀 안 한다는 건 좀 너무하지 않습니까? 전 남성이 여성에 비해 누리는 게 훨씬 많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공중화장실 갈 때를 비교해 보자고요. 남성들은 변이 마려우면 부담 없이 화장실에 가도 됩니다. 남성들의 유일한 걱정이라 해봤자 휴지가 없으면 어쩌나 정도지요. 하지만 여성은 다릅니다. 일단 화장실에 갔다가 몰카에 찍힐까 봐 걱정해야 합니다. 용변 장면을 보면서 흥분하는 남성 변태들이 있기 때문이지요. 실제로 남편이 자기 아내의 영상을 버젓이 올려놓은 '소라넷'을 생각하면 집에서도 마음 놓고 용변을 보지 못할 지경입니다."
"게다가 공중화장실을 이용했다가는 이번 강남역 살인 사건에서 보듯 목숨까지 잃을 수도 있습니다.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 여성들의 추모 열기가 뜨거웠던 것도 평상시 당해왔던 울분이 그 사건을 통해 분출되었기 때문이지요. 마스크를 쓴 채 추모 현장에 나타나 '남자를 잠재적 가해자로 몰지 마라'는 황당한 구호를 외치는 남성들의 모습은 외려 한국 남성의 문제점이 심각하다는 것을 드러내줬지요."
"의사들이 돈을 더 벌기 위해 제왕절개 수술을 권한다고 생각해서 아내분을 고생시켰는데,... "
" "'설현'이라는 아이돌이 원체 끝내준다(?)길래, 한 번 검색해보니 가소롭다", 오 선생님, 야구 중계 방송을 볼 때 교대 시간마다 설현이 나와서 이렇게 외치곤 합니다. '접속하라, 동부화재.' 저요, 그 후부터 입버릇처럼 '동부화재'를 외치고 다닙니다. 다음 달 보험 갱신할 때 제 차 보험사도 동부화재로 바꾸기로 했습니다. 이런 설현이 가소롭다니, 너무 나가셨습니다. 그렇더라도 이 책의 수많은 장점이 다 묻혀서는 안 된다고 믿기에, 이렇게 외쳐 봅니다. "접속하라, 그 남자!"
"다른 나라의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는 '너도 나도' 군대 정신이 필요하다고 난리다. 왕따를 당한 병사가 총을 난사하고, 동작이 좀 느리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집단 구타' 끝에 사람이 죽어간 비극이 등장해도 이 사회는 '일상의 병영화'를 만들고자 발악을 한다. 박노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전국 병영화는 비공식적 '국시'"다. 기마 자세로 3시간 버티기, 100km 야간 행군을 신입 사원 연수에서 하는 것은 기본이다. <진짜 사나이>란 예능 프로에서는 여자들에게 군대 경험을 시키고 "남자들이 이렇게 고생하는 줄 몰랐다"는 닭살 돋는 멘트를 기어이 끄집어 낸다. 연예인의 육아 생활을 보여주는 방송에서 네 살짜리 아이들에게 '병영 체험'을 시키는 기괴한 일도 발생한다. 아이는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로' 입소식도 하고 경례도 하고 눈물을 보인다고 교관에게 혼나기도 한다. 그 모습에 연예인 아빠는 응석받이로 자란 아이들에게 규칙과 틀이 필요했는데, 여기서 '어른스러움'을 보였다면서(불과 네 살짜리에게!) 흐뭇해한다. 그리고 '바보' 언론들은 방송의 캡처 화면을 모아 감히 '뉴스'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의 클릭을 유도한다."
"괜히 115위가 아니다. 아니, 115위도 기적 같다. 각설하고, 이는 군대에서 시간을 낭비해서 억울하다는 남자들이 실제로는 투자 대비 훨씬 높은 이익을 실생활에서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기도 한다. 남자들은 '2년을 낭비했다는 이유'만으로 늘 '우대'의 대상이 된다(그러니 '115위'가 가능하다)."
"자신은 군대 가기 전이나, 후나 그냥 '남자 사람'일 뿐인데 말이다. CBS의 변상욱 대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에 자기 한계를 넘어서는 혹독한 군사훈련이니 외부로부터 격리된 집단 수용생활이 인간을 절제와 협동심, 인내심, 자기성찰로 이끄는 효과가 뛰어나다면 남성 대부분이 군 복무를 한 우리나라는 품격 있는 신사로 가득 찼어야 한다."
"누가 이 말을 부인하겠는가. 온갖 나쁜 것에 대한 'OECD 1위', 각종 좋은 것에 대한 'OECD 꼴찌 수준'이라는 사실은 이제 별로 놀랍지도 않다. 웹툰이 원작인 드라마 <송곳>을 보면 대형 마트의 프랑스인 점장은 한국 사회를 이렇게 일갈한다. "한국인은 노조를 만들 자격이 없다. 한국인들은 뒤로 거래를 하고 공무원에게 뇌물을 먹인다." 사회적 합의로 만들어 놓은 '룰'을 따르지 않는 이 '코리안 스타일'을 만든 사람이 누구인가? 바로 '군대 갔다와' 진짜 남자가 되었다는 사람들 아닌가?"
"장인어른이 B와 같은 사단 출신이었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양주 한 병이 더 등장했고 결혼 승낙은 '이미' 과거형이 되어버렸다. 장인어른은 딸에게도 술잔을 권하며 한마디 한다. "내 평소 군대 안 간 사람하고는 연애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는데, 아버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구나. 정말 고맙다." B는 그때서야 생각했다. '아... 군대 다녀오길 정말 잘했구나....'"
"그런데 누가 억울해하고 있단 말인가? 교수님과의 소통을 가능케 하고 장인어른께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게 해준 군 복무 아니었던가. 단지 군대를 다녀왔다는 이유만으로 '조장'으로 선출되고 그래서 '리더십'을 배우고 이를 꼭 '자기소개서'에 작성하는 특혜를 입은 자는 '남자' 아니었던가? 자나 깨나 '군대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 왜 갑자기 "억울하다! 무엇인가 보상해달라!"고 외치는가? 이런 '언행 불일치'야말로 '군대 다녀온 남자라면' 절대로 하지 않는 행동이라고 스스로들 말하고 다니지 않았던가? '희생정신이 있어서 좋다!'는 주변의 평가에 히죽거리면서 왜 '군 복무 자체를 선택할 수 없어서' 그래서 가산점을 부여받을 수 없는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것을 '정당하다'고 하는가?"
"처음에는 "군대 안 다녀오셨어요?"라고 묻는다. 이때 나로부터 '26개월 복무 완료'라는 답변을 들으면 "군대도 다녀왔으면서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라고 반문한다. 이성이 마비된 질문의 대표적 사례다. 군대를 다녀왔으면 말 그대로 '민간인' 신분이다. 즉 군대라는 조직을 '군대의 입장'에서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 평가원이 되어 감시해야 함이 마땅하다. 그것이 시민의 본 모습이다. 하지만 한국 남자들은 시민의 역할에 대한 '직무유기'를 범하고도 당당하다. 그 당당함은 어느 한 곳의 폭력을 '당당하게' 정당화시키고 말았다."
"이런 시기가 지나면 '한량한' 병장 시절을 보내야 한다. 도무지 '나 같은 인간들에게' 왜 국가가 공짜로 밥 먹여주는지가 제일 의문이었다. 하루하루가 지겨웠다. '군 복무 기간 단축'을 반대하는 이들은 병사들의 전투력을 상승시키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데 실제로 병장 생활 6개월은 '기껏' 쌓아올린 전투력이 하락하는 시기다. 병장들은 어떻게든 전투력 '축적'을 피하기 위해 요리조리 미꾸라지처럼 빠지는 데 도사가 된다. 왜? 제대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데, 곧 사회에 나갈 병장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겠는가. 그저 D-day만을 기다리면서 '짱 박혀서' 몸 조심하는 것이 바로 병장 본연의 자세다. 그래서 병장들 스스로가 세금 낭비를 막아야 한다면서 빨리 전역시켜 주는 게 누구에게나 좋지 않느냐고 묻는다. 이런 군 생활 줄이자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윤종빈 감독의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2005)는 '군대 적응=비인간화'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파헤친다. 그간의 군대에 관한 분석들은 지나치게 우회했다. 조직 이론을 들먹이기도 하고 영웅주의에 입각한 상징적 심벌을 강조하여 모순을 은폐한다든지, 군가 등을 목청 터질 듯 부르는 의례에서 집단주의가 형성되는 문제가 발생한다는 등 연역법에 근거해서 이론에 맞는 사례를 발굴했다. 그래서 관념적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돌직구를 날린다. 군대는 '너무 어린' 사람들끼리 '너무 오래' 함께 살고 있는 곳이라고."
"하지만 군대는 그러지 않는다. 용서를 우습게 안다.
태정은 승영에게 사과한다. 자신은 원하지 않았지만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승영을 폭력적인 방식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다는. 거의 변명에 가까운 사과였지만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승영에게 사과하는 태정의 모습은, 이후 그가 왜 '용서받지 못할 자'인가를 짐작하게 한다. 문제는 용서를 구할 줄 모르는 뻔뻔함이 아니라, 너무나 쉽게 용서를 구하는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있다.
가해자가 북 치고 장구 치고 가해자가 병 주고 약 주는 곳이 군대다. 이런 비합리성이 일상화된 공간에서는 폭력을 문제삼는 자가 유난 떠는 자로 인식될 뿐이니 가해자는 용서받을 것이 없는 자가 되어 살아간다. 일반적인 세상에서 폭력이 동반된 문제가 이처럼 쉽사리 해결될 리 없다. 하지만 군대를 거쳐가는 이들은 세상 이치의 '역', 즉 오답을 정답으로 배운다. 착한 어른들은 이렇게 살지 않는다. 하지만 태정은 말한다.
"착한 게 무슨 소용이냐. 말을 잘 들어야지."
용서를 구하는 자가 없는 곳에서의 피해자는 가해자 응징이 불가능한 분노를 본인이 가해자가 되면서 보상받는다. 영화에서 승영은 자신의 후임 지훈(윤종빈)을 그렇게 대한다."
"민방위 교육을 받는 사람들의 표정은 매우 어둡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그 이상의 용기를 낼 수는 없다. 그냥 혼자서 '멍하니' 속으로 앓기만 한다. 그래서 '잠'만 잔다. 옷 좀 '다르다고' 이렇게 소극적인 사람이 된다. 아니 남자의 원래 모습은 이렇다. 원래는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비교도 남자끼리를 구분할 때나 가능하다."
"어떤 이는 굳이 그렇게까지 나쁘게 표현해야 하냐면서 한탄한다. 김치녀, 된장녀, 맘충 등을 언급하면서 내게 "너는 그런 단어들에는 입에 거품을 물면서 호명된 이들을 보호해주더니 왜 개저씨는 그렇게 호명하는 이들의 편에 서냐?"면서 타박을 준다. 그럴 수밖에 없다. 모든 아저씨를 개저씨라 한다면 문제지만 개 같은 아저씨를 개저씨라고 표현하는 건 일종의 혁명이다. 없었던 존재를 악의적으로 지어낸 것이 아니라 원래 악랄한 것을 이제야 발견했기 때문이다. 꽃을 이제야 꽃이라, 아니 똥을 이제야 똥이라 부른 셈이다. 개저씨는 '신조어'일 뿐이지 새로운 인간의 등장을 뜻하지는 않는다. 개저씨는 김치녀, 된장녀, 맘충과는 성격이 완전 다르다. 이 용어들은 주로 약자를 향한 강자들의 낙인이다. 하지만 개저씨는 정반대다. 오랫동안 짓눌린 자들의 미세한 저항이 모이고 모인 이유 있는 반항이다. 지금껏 많은 이들이 참고 또 참았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의 부당함을 인지했고 비록 인터넷 공간에서 익명으로 수군거리는 수준에 불과하지만 어떻게든 피드백하는 용기를 보였다. 이 정도면 혁명적이지 않은가?"
"이분들이 살아생전 다시 오지 않을 변화의 기회를 놓치지 않길 바란다. '개저씨'란 말은 너무나도 친절한 사회적 계시다."
"그렇게 유야무야 넘어갔지만 최소한 확인된 라이따이한의 숫자만 해도 5000명이었다. 전문가들은 확인된 수가 그 정도라면 실제로는 2만 명이 넘을 것이라 추정한다. 한국군이 참전한 기간이 고작 8년 정도이니 실로 엄청난 숫자다. 이 짧은 기간에 단순히 '혼혈아'가 아니라 혼혈아'들'이라는 집단이 등장했다는 것은 '집단적인 가해 행위'가 있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전시 상황에서 순수하게 '아이'가 목적이었던 사람이 있었겠는가. '나는 떠나면 그만인데 콘돔을 왜 껴? 문제 생긴다고 내가 책임질 것도 아닌데, 그냥 싸지르고 말 거야'라고 생각하는 한국 남자들에 의한 성적 행위가 최소 수십만 번이었던 셈이다."
"강의가 끝나니 그녀가 내게 다가온다. 무엇을 물어보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녀가 '내게 다가온다'는 건 어떤 느낌이었다고 해야 할까? 요즘, '설현'이라는 아이돌이 원체 끝내준다(?)길래, 한번 검색해보니 가소롭다. '설현' 정도였다면 나는 '평소와는 다르게' 행동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친절하게 설명해주었을 것이고 부족하면 다른 장소로 이동하여 이야기를 이어 갔을 것이다."
"흉악범의 얼굴을 공개하면서도 '부연 설명'을 하는데 '남자들이 듣기에 기분 나쁨직한' 자기 취향 좀 말했다고, 또 공중도덕 하나 못 지켰다고 해서 '개인의 모든 것이 탈탈 털리는' 대상이 대부분 여자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인권'이라는 개념이 성별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고 있다는 뜻 아니겠는가."
"남자라면 '사람 문제'가 되고 여자라면 '여성 문제'가 된다."
"평론가들은 이를 여러 지점에서 해석한다. 우선 유디트의 외모에 대한 차이부터 언급한다. 위 그림에서 유디트는(맨 오른쪽) 덩치부터 크다. 초절정 미녀이자 적장을 꼬드긴다는 설정과는 잘 맞지 않는다. 하지만 카라바조가 그린 유디트는 피부 부터 곱다. 게다가 하녀를 주름살이 만연한 할머니로 표현해서 대비 효과가 좋다. 다음은 홀로페르네스이다. 위 그림에서 그는 분명히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다. 역동적인 그의 두 손의 위치가 이를 증명한다. 특히 별로 중요 인물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수도 있는 하녀가 (마치 자신이 주인공처럼) 정중앙에서 열심히 이 거사에 '동참'하고 있다. 그만큼 현재 상황이 다급하고 위험하다는 뜻이다. 평론가들은 이를 정녕코 여성의 입장에서 '그 순간'에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것이라 평가한다. 카라바조의 그림은 아예 말을 말자. 젓가락으로 국수 집는 퍼포먼스인가? 소시지도 힘 안 주면 썰리지 않는데 사람 목이 어찌 저렇게 순순히 칼에 썰린단 말인가? 게다가 하인은 참관인 수준이다. '거사'가 참으로 쉬워 보인다. 실제 상황에서 저렇게 차분할 리가 있겠는가. 카라바조는 '그녀가 잘 꼬드겼다'는 것만을 강조하고 싶었을까? 결국 여자는 여우라 그 말인가."
"그때부터 논개는 일본에서 '부부 금실을 좋게 해주는' 섹스의 신이 되었다(일본에는 신이 워낙 많으니 유연하게 이해했으면 한다). 그곳은 한동안 국내 정치인들이 일본을 방문하면 기념사진을 찍는 곳으로도 유명했다. 그러다가 2000년대에 이르러 시민 단체가 문제점을 지적하자 그곳에 걸려 있는 논개의 초상화도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논개가 이런 능욕을 당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한나라의 위인이 다른 나라 민간인의 자의적 해석으로 '서로 사랑해서 죽은 부부'가 되어버렸다. 과연 논개는 이렇게 찬밥 대우를 받을 만한 인물이었을까?"
"지지부진한 논의는 논개에게 '의기'라는 호칭을 부여하면서 절충된다. 끝까지 '기생'임을 강조하는 것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만약 실제 기생이었다고 해도 기존의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일계급 특진' 같은 상을 줘도 모자랄 판인데 말이다. 순국의 주체가 여성이라는 것을 부담스러워했고, 기생이 충을 '너무나도 모범적으로 실천한 사실(웬만한 남자는 명함도 내밀 수 없을 정도)을 찜찜하게여겼던 남자들의 역사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작전은 성공한 모양새다. 누구나 논개를 '기생 논개'라 부르는걸 마다하지 않으며 애써 평가절하했기에 다른 나라의 먹잇감이 되었으니 말이다. 하찮은 계급의 인간은 누군가에게 함부로 취급받아도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학습한 민간인이 그런 '영혼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수차례 그곳을 방문한 정치인들도 '기생이 죽음 한 번으로 횡재했네'라면서 별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긴, 성씨 떼어버리고 '이름만 부르는' 거의 유일한 위인이 논개 아닌가? '순신이, 중근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과는 명백히 대비된다. 그녀의 성명은 '주논개'다. 같은 '활약'을 해도 남자와 여자가 후대에 기억되는 방식은 이렇게 다르다."
"게다가 이런 변화의 조짐이 더욱 탄력 받아야 마땅하지만, 상황은 그리 녹록지 않다. 뭔가 변화에 발맞춘 주장이 나오면 '역차별'이란 단어로 공격하는 남자들, "여자는 의무는 다하지 않으면서 권리만을 주장하니 그런 여자를 싫어하는 건 나의 당연한 권리다"라는 막말을 쏟아내면서도 그것이 '표현의 자유'라고 생각하는 남자들을 만나는 건 어렵지 않으니 말이다.
리베카 솔닛의 표현을 빌리자면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언어가 혐오 발언을 보호하는 데 쓰이는 실정이다.' 정희진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종, 젠더, 계급 간의 위계에서 약자에 대한 강자의 표현의 자유는 혐오 범죄일 뿐이다. (......) 표현의 자유는 보편적인 권리가 아니라 보편성을 향한 권리다" 즉 표현의 자유는 약자가 "나에게도 너와 같은 권리를 달라"고 말할 때 등장할 수 있는 근거이지, 강자가 "내 맘에 안 드는 사람을 싫어할 권리가 있다"는 걸 합리화할 때 쓰이는 가치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표현의 자유'가 '혐오의 근거'로 쓰이고 있으니 이곳에서 여자는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남자는 회식과 출장, 잔업, 야근을 해도 아버지의 위치가 달라지지 않지만 결혼한 여자는 회식, 출장, 잔업, 야근 등 회사에서 요구하는 인재가 되는 순간 가정에서 부족한 엄마, 부족한 주부, 거기에 플러스 동료들에게 기가 센 여자라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 현실이더군요."
"기생이 무엇을 뜻하는지 정확히는 아니지만 '일반적(?) 여자는 아니라는' 것쯤은 대충 아는 눈치다. 어른들도 진주대첩보다는 논개를 더 또렷하게 기억한다. 위인전에도 등장하는 기생 논개, 그녀는 과연 '위인 논개'로서 대접받고 있을까? 아니면 결국 '기생답게' 푸대접을 받고 있을까?"
"마지막으로 '딸바보'라는 말이 없다. 나는 최근에야 등장한 '딸바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아들바보'라는 말은 없는데 '딸바보'라는 말은 왜 생긴 걸까? '딸'을 아빠가 사랑하는 건 당연한 것인데, 도대체 지금껏 어떻게 딸을 대했기에 부모가 자기 자식 사랑하는 게 '특별해' 보일 수 있을까? 이 단어를 보면 지금껏 한국의 여자들이 어떤 대우를 받았고 어떻게 살았는지가 그대로 드러난다. 온갖 편견 속에서 공정치 못한 대우를 받으며 살지 않았겠는가."
“‘커피를 파는’ 카페에서 이처럼 광범위한 차별을 쉽사리 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한국에서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실제 제한을 두는 대상이 ‘키즈’가 아니라 ‘아이 있는 엄마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중도덕 차원의 문제를 훌쩍 뛰어넘는다.”
"하지만 실제 논쟁의 양상은 이와 다르다. 노키즈존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아이들이 ‘뜨거운 아메리카노’에 화상을 입을 수도 있으니 ‘전체 집단을 통제’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저 ‘시끄러운 아이들 때문에’ 자신이 공부하는데 방해받았다는 말만 한다. 그러니 떠들 가능성이 있는 아이들은 죄다 출입을 금지시키자는 논리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엄밀하게 따져서 카페 ‘안’이 누군가의 ‘학습을 위해’ 존재한다고만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카페는 독서실, 도서관 같은 기준으로 통제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차별이 일상화되면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가 사회적으로 면죄부를 받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노키즈존’은 단순히 누군가가 ‘비용을 지불한 만큼 편의를 제공받을 권리가 있다’고 해서 정당화될 수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그럴 만한 이유’보다 더 중요한 사회적 가치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포기하지 말아야 할 상식, 즉 인권과 즉결된다.
한국 사회에서 ‘노키즈존’의 정당성을 피력하면서 진상 엄마 목격담이 등장하는 이유는 ‘여자 엄마들’에 대한 혐오감이 그만큼 만연하다는 방증일 뿐이다.“
“‘메갈리아’(메르스 갤러리 + 이갈리아의 딸들)가 사회적으로 알려진 것은 ‘미러링’(mirroring)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반론을 펼쳐도 남자들을 설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이들은 ‘미러링’이라는 기상천외한 묘안을 생각해냈다. 남자들이 ‘문제 될 것이 없다’면서 별 뜻 없이 내뱉는 문장에서 여자를 남자로만 바꾸니 ‘문제’가 선명하게 보였다. ‘여전히’ 남자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에 느끼는 한, 그것의 디지털적 표현 방식이 ‘미러링’이다.”
“우선 흡연자의 절대 다수가 남자다. 이들은 건물 입구를 완전히 독차지하고 타인의 간접흡연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다. 누군가 주의를 요구해봤자, ”건물 안이 금연이라 밖에 나와서 피우는 데 무슨 상관이냐“면서 당당하다. 예의도 꽝이다. 재를 그냥 허공에 날리는 건 당연하고 불을 끌 때도 재떨이에 비비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으로 그냥 ‘탁’ 하고 방바닥에 떨어버린다. 그리고 이들 무리로부터 약간 떨어진 곳에 바로 ‘소수의’ 여자들이 흡연을 ‘예의 바르게’하고 있다. 그녀들 때문에 간접흡연의 피해를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여자들이 남자들처럼 대범하지 않은 건 중요치 않다. 남자들이 쓸데없이 대범하니 문제다. 대범한 남자들이 없는 ‘여대’에 가도 마찬가지 현상을 목격할 수 있다. 이곳에서도 ‘건물 앞’에서 타인에게 피해를 준다거나 재를 허공에 날리는 흡연자를 발견하기는 힘들다. 여자들은 지정된 흡연 장소를 참으로 잘 지킨다.”
“장애인 비하가 명백한 ‘병신’이란 단어를 사람들은 자주,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한다.”
“그런데 이분들은 스스로를 ‘이모라고만’ 생각하는 모양이다. 비극은 보인들이 바로 ‘고모’ 역할도 하고 있다. 아니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 ‘아수라 백작’ 역할을 잘 하지 않으면 오히려 욕 먹는 게 여자의 삶이다.”
“주부들의 아침은 개인의 것이 아니다. 남편의 출근을 ‘위한’ 자녀의 등교를 ‘위한’ 시간으로서만 의미가 있다. 이게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매일 한다면 참으로 고역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여자들은 도대체 왜 이렇게 호구로 사는 걸까? 똑같은 질문을 남자들을 상대로 던지면 쉽게 답을 찾을 수 있다. 교회에 ‘열심히’ 나가는 남자들에게 ”왜 그렇게 열심히 교회에 다니세요?“라고 물으면 물론 두리뭉술한 답변이 나오겠지만 결국에는 ‘인맥 관리’가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여자의 경우는 이것이 결정적인 이유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짜 이유일까? 여자들이 교회에서 어떤 기도를 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그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한다. 인맥 형성과 관리라는 목적의식이 있는 남자들에 비해 여자들의 기도는 훨씬 간절하다. 남자들과 같은 주체의 기도를 해도 여자들의 표현력과 언어는 풍성하기 그지없다.”
“딸아이가 유치원에 다닐 때, 목욜을 시켜주다가 있었던 일이다. 딸은 욕조 옆에 있는 작은 거울을 보면서 목욕 내내 온갖 포즈를 잡는다. 물론 그 포즈는 미녀 배우가 화보를 찍을 때 촬영장에서 보여주는 그런 현란한 모습이라 생각하면 된다. 그러면서 10여 분의 짧은 시간 동안 ”아빠, 나 예뻐?“를 족히 200번은 묻고 또 물었다. 보통의 아빠들이라면 평범하게 받아들일 일곱 살 ‘천생 여자아이’의 모습일 수 있다. 딸의 이 귀여운 모습을 사랑하지 않을 부모란 없다.
하지만 난 좀 달랐다. 먹먹했고 울적했다. 나는 내 딸이 그러지 않기를 무척이나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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