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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축구를 하며 생각한 것들" - 손흥민 -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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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축구를 하며 생각한 것들" - 손흥민 - ★★★★☆

Stan Lee 2020. 7. 4.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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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책 : 손흥민, 『축구를 하며 생각한 것들』, 브레인스토어

 

다 읽은 날짜 : 2020년 6월 13일, Ridibooks

 

 

< 읽게 된 동기 >

 

국내를 넘어 전 세계적인 축구 스타가 된 손흥민 선수의 성공 스토리가 너무 궁금했다.

 

 

< 한줄평 및 별점 >  ★★★☆ ( 4점 / 5점 )

 

'성공은 선불이다'라는 손흥민 선수의 아버님의 말처럼, 성공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취업 후 나태해진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 서평 >

 

작년 여름, 정확히는 6월 2일. UEFA Champions League 결승전이 열렸다. 전 세계 최고의 축구 클럽 대항전. 이 대단한 토너먼트 대회 결승전에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로 선발 출전한 선수가 있었다. 그 주인공은 현재 영국 프리미어리그 최고의 공격수로 꼽히는 '손흥민' 선수. 개인적으로 축구를 즐겨 보진 않지만, 이날은 친구와 함께 스포츠 펍에서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관람하며 손흥민 선수가 뛰는 토트넘을 응원했다.

 

개인적인 생각일 수도 있지만, 아마 우리나라에서 손흥민 선수를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차범근 감독님, 박지성 선수 이후로 세계 최고 축구 시장으로 꼽히는 유럽 리그에서 최정상 공격수로 평가받고 있으며, 그런 최고의 실력을 갖췄으면서도 항상 웃는 얼굴로 매 경기 최선을 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그의 성공 스토리가 궁금했다.

 

그러던 찰나, 십오야 쿠폰(리디북스에서 매달 15일 자정에 뿌리는 쿠폰)을 받으러 들어간 리디북스 홈페이지 메인에서 손흥민 선수의 자서전이 출간됐다는 광고를 보게 되었고,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바로 그 자리에서 구매했다. 손흥민 선수가 어떻게 성공했고,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그리고 그의 사진에 항상 등장하는 '험상궂게' 생긴 그의 아버지 '손웅정' 씨는 어떤 사람이고, 손흥민 선수에게 어떤 존재인지 등등 궁금한 게 너무 많았다.

 

그렇게 읽어 내려가기 시작한 '축구를 하며 생각한 것들'에는 그의 치열한 삶은 물론, 오늘날의 '손흥민'을 있게 한 그 원동력에 대해 자세히 서술되어 있었다. 개인적으로 책을 읽으며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손흥민 선수의 한결같은 '축구에 대한 열정'이고, 다른 하나는 오늘날의 손흥민 선수를 만든 아버지 '손웅정' 씨에 대한 이야기다. 책을 읽으며 내내 든 생각은, '역시 성공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였다.

축구밖에 모르는 바보, '손흥민'


누군가의 자서전을 읽으며 가장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는, 그 사람의 성공이 있기까지 그가 어떤 생각과 선택을 거쳤는지를 상세히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손흥민 선수의 자서전도 마찬가지다. 겉으로는 절대 알 수 없었던 손흥민 선수의 이런저런 생각들은 물론, 어린 시절 그가 어떻게 축구를 시작하게 됐는지, 초창기 유럽에서의 생활은 어땠는지 등등에 대해 굉장히 상세히 서술하고 있었다. 평소에 궁금했던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느낌이랄까? 책의 에필로그에서 손흥민 선수가 이 책을 쓰게 된 이유를 밝히는데, 현재 본인의 화려한 성공에 가려진 피나는 노력에 대해 밝히고 싶었다고 한다.

 

"2019년의 손흥민은 그럴듯해 보이는 사람이에요. 프리미어리그의 인기 팀에서 뛰는 프로 축구선수죠. UEFA 챔피언스리그, FIFA 월드컵, AFC 아시안컵 등 축구 선수라면 누구나 꿈꾸는 무대에서 뛰어 봤어요. 더 큰 꿈을 꿔도 될 만큼 젊죠. 남들이 보기에 이런 제 모습이 화려해 보일지 몰라요. 하지만 그것은 지금 이 순간의 겉모습입니다. 힘들었던 과거와 뒤에서 이루어지는 노력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죠. 지금까지 어려웠던 날이 훨씬 많았어요. 좌절하며 눈물을 흘린 순간도 많았고요. 사실 지금도 인내하고 또 인내하며 살고 있어요.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죠. 제가 과분한 TV 다큐멘터리 촬영을 하고 이렇게 책을 내기로 한 이유이기도 해요. 지금 이 자리에 오기까지 필요했던 저의 뒷모습을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 Epilogue 중

 

이렇게나 축구를 좋아하다 보니 축구하기 위한 자기 관리에도 철저하다.

 

“도대체 내가 어떻게 이런 시즌을 보낼 수 있었을까? 우선 평소 자기 관리의 선물인 것 같다. 10개월에 달하는 시즌은 온전히 축구의 몫이다. 훈련에서 돌아오면 그때부터 내일 훈련의 준비를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지낸다. 그라운드 안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밖에서 에너지 소모를 최대한 줄인다. 이는 몸과 마음 모두 해당한다. 얼마 전 내가 영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결혼은 은퇴 후”라고 말한 것이 큰 화제가 된 걸로 안다. 물론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리오넬 메시처럼 가정을 꾸리면서도 세계 최고의 자리를 유지하는 선수도 많다. 사람마다 가진 능력의 차이를 부정하기 어렵다. 천재성을 타고나지 못한 나는 24시간을 통째로 축구에 들이부어야 지금의 경기력을 유지할 수 있다. 축구를 잘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축구만 해야 한다. 런던에도 유혹은 얼마든지 있다. 프리미어리그 선수는 본인만 원하면 얼마든지 화려한 삶을 만끽할 수 있다. 젊고 돈 많고 평소 시간도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를 망각하지 않는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축구를 잘하고 싶은 마음이 가장 크다. 경기력 향상을 위해서라면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는다. 재미없는 삶이다. 정말 따분하기 그지없다. 그래도 감수한다. 그렇게 해서 매 시즌 프리미어리그 우승에 도전할 수 있다면, ‘올해의 선수’로 선정될 수 있다면, ‘올해의 골’을 넣을 수 있다면, 팬들을 즐겁게 해 줄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축구 24시간’의 생활을 받아들이고 싶다. UEF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뛸 수 있다면 나는 얼마든지 수도승으로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정작 놀란 부분은 손흥민 선수의 축구에 대한 '사랑'이었다. 말 그대로 '사랑'. 초등학교 3학년 때 축구선수가 되겠다고 아버지께 선언한 이후 수십 년이 지난 현재까지 축구에 대한 사랑은 현재 진행형이다. 본인 스스로가 '축덕', '축빠'라고 부를 정도로 축구를 좋아하며, 축구 선수로는 최고의 성공 가도를 걷고 있는 현재도 집에서 쉴 때 틈틈이 주요 축구 선수나 본인의 플레이 영상을 여러 차례 돌려보며 개선점을 찾을 정도로 24시간 축구만 생각한다고 한다.

 

“우울함 속에서 나를 지켜 준 것은 축구였다. 나는 축구를 좋아한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좋아한다. 쉴 때도 나는 축구 영상을 찾아본다. 내 경기 영상도 자주 본다. 상황마다 다른 판단을 했을 때를 상상해 본다. 다른 팀이나 선수의 영상을 보면서 잘한 부분과 못한 부분을 찾아내며 공부한다. 훈련과 경기를 위해서 그라운드 안에 들어가 있는 시간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다. 어제 경기에서 져도, 파파라치 컷으로 곤욕을 치러도, 다른 엉뚱한 일들이 끊이지 않아도 일단 축구화를 신고 잔디 위에서 축구공을 차는 순간 머릿속에 있던 모든 잡념이 사라진다. 내가 제일 자랄 수 있는 것도 축구,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도 축구다. 축구만 할 수 있다면 나는 매일 새롭게 태어난다. 컴퓨터를 리부팅하면 속도가 빨라지는 그런 느낌이다.”

 

이 내용을 보면서 얼마 전 페이스북에서 우연히 본 서울대 의대생의 합격 수기가 생각났다.

 

"독서실에 마지막까지 남아 공부를 한다. 참 웃기는 일이었다. 내가 제일 공부를 잘하는데, 내가 제일 열심히 한다." - 서울대 의예과 수석 합격자의 글 중

 

매번 느끼지만 역시 성공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그들의 화려한 성공 뒤에는 처절할 정도로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은 성공한 현재도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는데, 과연 내 현재 모습은 어떤가. 책을 읽으며 나태해진 내 모습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아버지의 놀라운 헌신


다음으로 놀랐던 부분은 바로 손흥민 선수의 아버지 '손웅정' 씨의 헌신이었다. 손흥민 선수의 '축구'에 대한 집착만큼이나 아버지 손웅정 씨의 한결같은 헌신 역시 대단했다. 읽는 내내 혀를 내두를 정도였는데, 현재의 손흥민 선수는 아버지의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몇몇 일화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최대한 추린다고 추렸는데도 쓰고 보니 많다... 그만큼 아버지와 관련된 일화가 많다.)

 

아버지의 지옥 훈련

 

손흥민 선수의 말을 빌리자면 그의 축구는 온전히 아버지의 작품이라고 한다. 학창 시절 엘리트 코스에서 축구를 배운 기간이 1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니, 나머지 기간은 오로지 아버지 밑에서 축구를 배운 것이다.

 

“아버지가 나를 위해서 그동안 기울였던 지극정성은 값으로 따질 수 없다. 엘리트 코스에서 축구를 배운 기간이 1년 정도밖에 안 되었으니 나의 축구는 온전히 아버지의 작품이었다. 도공이 단 한 개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서 수많은 도자기를 빚고 깨기를 반복해야 한단다. 아버지는 나라는 도자기를 빚기 위해서 아무런 대가 없이 7년 세월을 보냈다. 내가 여기서 자리를 잡지 못한다면 엄청난 불효일 수밖에 없다.”
“아버지는 ‘너희는 훈련만 한다. 그 외의 준비나 뒤처리는 전부 내가 한다’는 주의였다. 축구 훈련을 하려면 여러 가지 준비가 필요하다. 맨땅에 떨어진 돌을 치워야 하고 축구공과 콘도 매일 들고 날라야 한다. 나는 그런 일을 해 본 적이 없다. 축구공을 잔뜩 채운 냉장고 종이 박스도 들어 본 적이 없다. 나는 훈련만 하는 대신, 훈련을 위해서 100%를 쏟아야 했다.”
“아버지는 정말 무서운 지도자였다. 그때도 축구교실을 운영하고 계셨는데 너무 엄하게 가르치다 보니 며칠 만에 그만두는 학생이 많았다. 가르치는 내용도 허구한 날 볼리프팅이었으니 아이들은 금방 싫증을 냈다. 손씨 집안의 형제에게는 그만둘 권한이 없었다. 싫증이나 게으름도 사치였다. 조금만 느슨해졌다 싶으면 곧바로 불벼락이 떨어졌다. 어린 아들이라고 해도 실수하거나 집중하지 않으면 정말 무섭게 혼냈다. 훈련하면서 칭찬받은 기억은 거의 없다. 많이 혼났다. 독자 여러분께서 생각하시는 그 ‘많이’가 아니다. 정말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그리고 무섭게 혼났다. 그런 훈련을 나는 축구부에 들어가 합숙 생활을 시작했던 중학교 3학년 이전까지 매일 반복했다. 그렇다. 7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아버지의 하드트레이닝 탓에 웃지 못할 해프닝도 많았다. 한 번은 운동장에서 형과 내가 또 심하게 혼나고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본 동네 할머니가 경찰에 신고하시겠다고 했다. 아버지가 자초지종을 설명했지만, 할머니는 “자기 자식이면 절대 그렇게 못 해! 당신 의붓애비지?”라며 믿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경찰서로 향하는 할머니를 쫓아가 겨우 만류했다. 이런 식의 민원이 끊이지 않았다. 물론 우리 형제의 하드트레이닝도 쭉 이어졌고.”

 

아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독일로 날아오신 아버지

 

그렇게 혹독한 훈련을 거친 결과, 손흥민 선수는 결국 분데스리가 함부르크 팀의 유소년팀에 입단하게 된다. 하지만 사춘기 청소년이 낯선 유럽 땅에서 혼자 버티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가족과 통화할 때마다 이런 힘든 모습이 티가 났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런 모습을 보며 아버지는 결국 아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한국에서의 일을 모두 정리하고 독일로 넘어온다.

 

“내가 힘든 티를 낼 때마다 아버지는 “성공은 선불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지금 인생을 투자해야 10년, 20년 후에 결과를 거둘 수 있다고. 하지만 그런 아버지도 속내는 안타까움으로 가득했던 것 같다. 결국, 고민 끝에 아버지는 한국의 일을 정리하고 독일로 넘어오시기로 했다. 있는 돈, 없는 돈을 전부 끌어다 숙소 근처에서 제일 싼 호텔을 거처로 삼으셨다.”
“아버지는 내가 지내는 클럽하우스 숙소를 직접 보더니 기겁하셨다. 결벽증에 가까운 아버지의 청결 기준에 내가 지내던 방은 거의 쓰레기통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당장 청소부터 하셨다. 침대 매트리스를 들어내 숨은 먼지를 털어내고 물걸레로 방안 구석구석을 일일이 닦았다. 지금도 아버지는 런던 집을 매일 두 시간씩 청소한다. TV 드라마에서 가끔 나오는 그런 대청소를 매일 하신다. 창틀 먼지까지 닦으신다. 진공청소기를 잡는 아버지의 손 부위에는 굳은살이 배겨 있다.”
“아버지는 한국에서 들고 온 밥솥으로 직접 흰쌀밥을 지어 막내아들에게 먹이셨다. 함께 잔뜩 싸 오신 김치와 김만으로도 너무 맛있었다. 남들에게는 보잘것없는 밥상일지 몰라도 내게는 진수성찬이었다. 숙소 규정 때문에 밥솥을 사용한 뒤에는 눈에 띄지 않는 곳에 감춰 둬야 했다. 내가 훈련을 나간 뒤에 아버지는 혼자 내 방에 남아서 밥솥을 옷장 안에 꼭꼭 숨기는 등 궂은일들을 도맡아 하셨다.”
“훈련도 직접 참관하셨다. 아버지는 멀리 떨어져서 꿈쩍하지 않은 채 처음부터 훈련하는 아들을 지켜봤다. 팀 훈련이 끝나고 숙소로 함께 돌아온 아버지는 “이제 근력을 키워야 한다”라면서 작은 체력단련실에서 아들을 챙기셨다. 게으름이나 꾀병을 위한 틈은 없었다. 아버지는 말만 하고 뒷짐 지는 타입의 지도자가 아니다. 모든 근력 운동을 나와 똑같이 하셨다. 심지어 나보다 더 무거운 무게를 들 때도 있었다.”
“나를 위해서 한국에서 날아온 아버지가 눈앞에서 그렇게 열심히 하시는데 내가 게을러질 수는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클럽하우스 체력단련실의 귀신 부자가 되어 갔다. 독일 친구들은 한국인 부자를 신기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께 감사할 뿐이었다. 그때 아버지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나는 중도에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혼자 버티기에는 함부르크 유소년 생활이 너무 외롭고 배고프고 힘들었다.”

 

기숙사 청소는 물론 밥을 좋아하는 아들을 위해 기숙사 사감의 눈을 피해가며 밥솥을 반입해 밥을 지어 먹였으며, 모든 훈련을 참관하고, 한창 성장기에 있는 아들과 모든 근력 운동을 똑같이 했다고 한다. 손흥민 선수가 방황하지 않고 유소년 시절을 성공적으로 보낸 데에는 이런 아버지의 헌신이 있었다.

 

아버지의 정신교육(?)

 

마땅한 타이틀이 떠오르지 않아 '정신교육'이라는 단어를 썼는데, 손흥민 선수가 점점 골을 넣고 성공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나태해지지 않고, 교만해지지 않도록 아버지가 옆에서 엄청난 역할을 했다. 이와 관련된 두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하나는 손흥민 선수가 분데스리가 데뷔 첫 골을 기록했을 때의 이야기고, 다른 하나는 아시안컵에 처음으로 다녀오고 난 뒤의 이야기다.

 

“나의 분데스리가 데뷔골은 팀의 2-3 패배로 빛이 바랬다. 허망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뛰는 가슴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열아홉 살인 내가 그 유명한 분데스리가에서 골을 넣었다. 유소년 계약 1년 만에 말이다. 경기 후 선수단은 곧바로 함부르크로 돌아왔다. 클럽하우스 숙소에 도착했을 땐 이미 새벽 2시가 넘었다. 아버지가 호텔로 돌아가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텅 빈 집에 혼자 들어가는 기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항상 문을 열고 들어가면 누군가가 반겨 주기를 바란다. 그런 성격을 잘 아시는 아버지는 그때도 지금도 내가 귀가할 때까지 주무시지 않는다. 울컥하는 마음에 아버지와 포옹했다. 아버지의 반응은 고요했다. 작은 목소리로 “수고했다. 어서 쉬어라. 다음 경기 준비해야지”라고만 하실 뿐이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눈치를 보며 짐을 풀었다. 아버지는 내가 쓰던 노트북을 집어 들고는 “오늘 이건 내가 가져가마”라고 조용히 말했다. 프로 데뷔골에 대한 인터넷 반응을 구경하면서 웃으며 잠들고 싶었는데. 아버지는 “흥민아. 축구선수한테 제일 무서운 게 교만이야. 한 골 넣었다고 세상은 달라지지 않아. 지금 네가 할 일은 다음 경기 준비야. 내일 보자”라면서 방을 나가셨다. 갑자기 방이 휑하게 느껴졌다. 분데스리가 데뷔골의 감흥을 즐길 방법이 전혀 없었다. 최근에야 아버지는 그때 이야기를 하신다. 싸구려 호텔 방으로 돌아가면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기도를 하셨단다. “하느님, 흥민이가 오늘 하루만 기억상실증에 걸리게 해주세요”라는 기도. 아들의 프로 데뷔골에 대한 기쁨보다 어린 내가 자만할지 모른다는 걱정이 앞선 것이다.”

 

다음은 손흥민 선수가 아시안컵에 첫 출전 하고 난 뒤의 이야기다. 아시안컵에 다녀오고 난 뒤 밥을 많이 먹어서 체중이 불어났었다고 한다.

 

“불어난 체중이 숫자로 표시되자 스스로 큰 충격을 받았다. 주위에 있는 모든 분이 ‘체중 게이트’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특히 소식을 접한 아버지의 두 눈에서는 분노의 불길이 치솟았다. 평소 “조금 좋다고 꼴값 떨고 교만해지고 나대면 안 된다. 반대로 조금 상황이 힘들다고 소심하게 있을 것도 아니다. 항상 자기 선을 지켜야 한다”라고 그렇게 강조했던 부분이 내 안에서 아시안컵에 다녀온 딱 한 달 만에 와장창 무너졌기 때문이다.”
“몸은 무겁고 경기도 풀리지 않는 상태로 2010-11 시즌이 막을 내렸다. 개인 기록은 시즌 15경기(선발 8회) 3골이었다. 만족할 만한 기록은 아니어도, 프로 데뷔전에서 골을 넣었고 국가대표팀에 뽑혀 아시안컵에도 다녀왔다. 타지에서 2년 넘게 버틴 고생을 생각하면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했다. 하루라도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가족도 그리웠고 집밥도 실컷 먹고 싶었다. 아시안컵에서 친해진 형들과 만나서 놀고도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아버지를 설득해야 했다. 시즌이 끝나갈 즈음 아버지가 “나는 자존심 상해서 못 돌아간다”라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아시안컵 직후 무너진 밸런스와 (SNS의 재미를 알아 버린?) 나의 달라진 태도가 아버지의 분노를 샀다. 아버지가 무서워서 나는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는 말은 꺼내지도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았다.”
“귀국하자마자 춘천으로 갔다. 대표팀에서 알게 된 선후배, 친구들에게는 일단 나중에 보자고 메시지를 남겼다. 아버지의 훈련이 영원히 이어지진 않을 테니까. 독일로 돌아가기 전에 휴가를 즐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엄청난 착각이었다. 다음 날부터 나는 죽었다. 아침 8시에 밥을 먹고 체력 단련장에 가서 아버지와 함께 근력 운동을 했다. 그리고는 뒷산의 높다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했다. 웨이트가 끝나면 운동장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축구공 20개를 들고 내 앞에 나타났다. 나는 위치를 옮겨 가면서 슛을 때리기 시작했다. 매일 1천 개씩. 그렇다. 1천 개다. 같은 골문을 향해서 오른발 500번, 왼발 500번 슛을 때렸다. 내가 슛 능력을 타고났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전혀 사실이 아니다. 나의 슈팅은 2011년 여름 지옥훈련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성미 급한 초여름 햇살이 내 정수리를 열정적으로 찔러 댔다. 죽을 것 같았다. 정말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땀을 너무 많이 흘려서 어지러웠다. 눈앞이 흐려졌다. 슈퍼마켓에서 사 온 초콜릿과 바나나를 입안에 욱여넣어 떨어진 당을 채웠다. 서 있기만 해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훈련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면 저녁을 먹자마자 쓰러져 자기 바빴다. 스마트폰을 들어 올릴 힘조차도 남아 있지 않았다. SNS는 끊긴 지 오래였다. 대표팀 형들의 각종 경조사도 모두 스킵했다. 혹시나 사람들이 내가 건방 떤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걱정도 들었다. 누워서 그런 걱정을 하다가 이내 잠에 곯아떨어졌다. 다음 날 일어나면 지옥훈련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렇게 5주를 보냈다. 하루도 쉬지 않았다. 함부르크의 여름 프리시즌 훈련 일정에 맞춰 독일로 향했다. 아버지는 다른 일이 있었던 탓에 나 혼자 비행기에 올랐다. 5주 훈련은 지옥 같았지만, 그 과정을 버틴 몸은 천국의 날개 달린 천사처럼 가벼웠다. 살면서 이런 컨디션은 처음이었다.”
"춘천의 지옥훈련은 내게 최상의 컨디션을 선물했다. 체중이 줄고 근력을 키웠으니 그라운드에서 몸이 날아갈 것 같았다. 훈련과 연습 경기에서 내 페이스를 따라올 상대가 없었다. 프리시즌에 뛰었던 6경기에서 나는 15골을 몰아쳤다. 최강 바이에른 뮌헨을 상대로도 두 골을 넣었다. 코칭스태프를 비롯해 구단 식구들 모두 이런 나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시간이 흐른 뒤에 들은 이야기가 있다. 첫 시즌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갈 때 구단에서는 나를 거의 포기했다고 한다. 내부적으로 ‘손흥민은 이제 끝났다. 저렇게 불어난 체중에 휴가까지 다녀오면 절대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한다’라고 진단했다. ‘반짝 유망주’로 끝날 것이라는 자체 판단이었다. 에이전트인 티스는 이런 분위기에 관해서 우리 가족에게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다행히 나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돌아왔다. 구단에서는 나의 격변이 큰 화제였다. 아버지의 지옥훈련 내용을 살짝 알려주자 다들 혀를 내둘렀다. 구단에서는 “아버지가 너를 살렸다”라고 말했다.”

과거 손흥민 선수의 기사를 볼 때마다 아버님의 사진을 보며 놀랐던 적이 있다. 사실 그때는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알지도 못했지만, 그의 사진만 봐도 정말 '무섭게' 생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말 그의 첫인상처럼 손웅정 씨는 대쪽 같은 사람이었다. 이런 아버지가 곁에 있으니, 손흥민 선수는 나태해지고 싶어도 나태해질 수 없었을 것이다. 관련 에피소드들을 읽으며 정말 대단한 부자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 손흥민 선수의 아버지, 손웅정씨


이처럼 손흥민 선수의 성공에는 그의 한결같은 축구에 대한 사랑과 아버님의 헌신이 있었다. 그리고 이는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현재 손흥민 선수는 가족들과 함께 런던에 거주하고 있고, 아버님은 여전히 런던 집을 매일 2시간씩 청소하신다고 한다.

 

책을 읽으며 왜 손흥민 선수가 성공할 수밖에 없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또한, 이제는 한국을 넘어 전 세계에서도 '스마일 보이'라는 애칭과 함께 사랑받는 축구 선수가 되었으니, 앞으로 그가 얼마나 더 대단한 역사를 써 내려갈지가 기대가 된다. 지금도 성공했지만, 그의 현재 런던 생활을 보면 앞으로가 더 기대된다.

 

“시즌 중 나의 일과는 간단하다. 7시 30분에 일어난다. 잠이 많아서 매번 아버지가 깨워 주신다. 가벼운 아침 식사를 한다. 과일, 꿀, 홍삼, 우유 반 컵으로 시장기만 없애고 직접 차를 몰아 훈련장으로 출근한다. 훈련은 보통 오전 10시나 10시 반부터 시작하지만 나는 항상 9시까지 훈련장에 도착한다. 훈련에서 최고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체중을 재고 체력 단련실에서 가볍게 몸을 푼다.”
“프리시즌이 시작되는 7월부터 시즌이 끝나는 이듬해 5월까지 대략 10개월 조금 넘게 나는 매일 이 생활 패턴을 유지한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이렇게 10개월을 살기가 쉽지 않다. 솔직히 정말 어렵다. 못 믿겠다면 한 번 시도해보셔도 좋다. 10개월 내내 저녁 10시 전에 잠자기. 10개월 내내 정크푸드 먹지 않기. 10개월 내내 자유 시간에 외출하지 않고 집에서 쉬기. 10개월 내내 스트레스를 빨리 털고 평정심을 유지하기.”
“오늘 만족하지 않고 내일 더 잘하고 싶다. 오늘 훈련보다 내일 훈련에서 더 잘하고 싶다. 다가오는 경기에서 이길 수 있게 팀을 돕고 싶다. 훈련이든 경기든 나는 최고가 되고 싶다. 그래야 프리미어리그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뛰는 기회를 허투루 낭비하고 싶지 않다. 이렇게 뛸 수 있는 현역 시간도 아주 짧다. 그 값을 치러야 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 살면서 수백 번, 아니 수천 번도 넘게 들었지만 이를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한결같은 그의 노력과 아버님의 헌신을 보며, 나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 어떤 자기계발서보다 내게는 영양가 있는 책이었다. 서평의 마무리는, EPL 최고의 골로 뽑힌 손흥민 선수의 70m 드리블 골로 하겠다. 평소 축구를 잘 보지 않지만, 이날은 왜인지 생방송으로 보고 있어서 정말 운 좋게 이 골을 라이브로 보았다. 보면서 소리를 질렀던 기억이...

 

 

< 인상 깊은 문구 >

 

“기나긴 시즌을 보내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한 경기, 한 골, 한 순간을 콕 집어 정리하기가 어렵다. “힘들지 않은가?”라는 질문을 제일 많이 들었다. 나는 기계가 아니라서 당연히 힘들다. 경기를 위해서 대륙과 대륙을 왕복하다 보면 피로가 쌓인다. 그래도 행복하다. 경기에 계속 출전할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할 뿐이다. 축구선수는 뛰고 싶어도 못 뛸 때가 정말 많다. 다치거나 징계를 받을 수도 있고, 단순히 경쟁에서 밀려 기회를 얻지 못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프로 생활을 하면서 선발 명단에 내 이름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를 깨달았다. 올 시즌 내내 계속 뛸 수 있음에 감사하면서 지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나를 지켜주는 게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몸을 온전히 유지했다.”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뛴 게 어디냐고? 아니다. 그건 위로가 될 수 없다. 세상에 결승전 출전에 만족하는 축구선수는 없다. 나는 결승전에서 이기고 싶었다. 내 꿈은 우승이었다. 찬란한 빅이어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면서 세상을 품고 싶었다. 갑자기 모든 희망이 누군가에 의해 거절당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이러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었는데…”
“셋째, 아버지의 교육 신조도 한몫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내가 아버지에게 들었던 말은 “나가 놀아”뿐이었다. 아버지는 지금도 “자유라는 연료를 태워야 창의력이 빚어진다”라고 말씀하신다.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고 관찰하면 무엇을 잘하는지, 무엇을 재미있어하는지 자연스레 알게 된다는 이론이다. 내가 프로 축구선수가 된 걸 보면 그 교육관이 꽤 신빙성이 있지 않나 생각한다.”
“2002 한일 월드컵이 열리기 1년 전인 2001년, 초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 나 혼자 중대 결심을 했다. 축구를 진지하게 배워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놀아 본 것 중에서 축구만큼 재미있는 게 없었다. 학교에 가도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나는 공을 갖고 운동장으로 달려 나갔다. 알다시피 쉬는 시간은 축구를 충분히 즐기기에 너무 짧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매번 다음 수업에 늦어서 혼이 났다. 점심시간에도 밖에서 공을 찼고, 수업이 모두 끝나고 나서도 축구를 했다. 할 때마다 내가 제일 잘했다. 친구들을 쉽게 제쳤고 달리기도 내가 제일 빨랐다. 항상 이기는 게임만큼 재미있는 게 어디 있을까.”
“자식의 고집과 부모의 걱정이 부딪히면 언제나 자식이 승리한다.”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은 내게 너무나 값진 경험이었다. 나도 잘 안다. 그런데 알아도 너무 아프다.”
“아버지는 ‘너희는 훈련만 한다. 그 외의 준비나 뒤처리는 전부 내가 한다’는 주의였다. 축구 훈련을 하려면 여러 가지 준비가 필요하다. 맨땅에 떨어진 돌을 치워야 하고 축구공과 콘도 매일 들고 날라야 한다. 나는 그런 일을 해 본 적이 없다. 축구공을 잔뜩 채운 냉장고 종이 박스도 들어 본 적이 없다. 나는 훈련만 하는 대신, 훈련을 위해서 100%를 쏟아야 했다.”
“아버지는 정말 무서운 지도자였다. 그때도 축구교실을 운영하고 계셨는데 너무 엄하게 가르치다 보니 며칠 만에 그만두는 학생이 많았다. 가르치는 내용도 허구한 날 볼리프팅이었으니 아이들은 금방 싫증을 냈다. 손씨 집안의 형제에게는 그만둘 권한이 없었다. 싫증이나 게으름도 사치였다. 조금만 느슨해졌다 싶으면 곧바로 불벼락이 떨어졌다. 어린 아들이라고 해도 실수하거나 집중하지 않으면 정말 무섭게 혼냈다. 훈련하면서 칭찬받은 기억은 거의 없다. 많이 혼났다. 독자 여러분께서 생각하시는 그 ‘많이’가 아니다. 정말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그리고 무섭게 혼났다. 그런 훈련을 나는 축구부에 들어가 합숙 생활을 시작했던 중학교 3학년 이전까지 매일 반복했다. 그렇다. 7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형과 내가 싸우다가 걸리면 볼리프팅 벌을 받았다. 하루는 형과 내가 심하게 싸우다가 아버지에게 딱 걸렸다. ‘형제의 난’을 절대 허락하지 못하는 아버지가 잔뜩 화가 나서 볼리프팅을 명하셨다. 그렇게 네 시간 동안 볼리프팅을 한 적이 있다. 네 시간이다! 나중에는 공이 세 개로 보이고 바닥이 울렁거렸다.”
“아버지의 하드트레이닝 탓에 웃지 못할 해프닝도 많았다. 한 번은 운동장에서 형과 내가 또 심하게 혼나고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본 동네 할머니가 경찰에 신고하시겠다고 했다. 하버지가 자초지종을 설명했지만 할머니는 “자기 자식이면 절대 그렇게 못 해! 당신 의붓애비지?”라며 믿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경찰서로 향하는 할머니를 쫓아가 겨우 만류했다. 이런 식의 민원이 끊이지 않았다. 물론 우리 형제의 하드트레이닝도 쭉 이어졌고.”
“매일 똑같은 볼리프팅과 8자 드리블 프로그램만 반복하니까 당연히 따분하게 느껴질 때도 많았다. 능숙해졌다고 생각해도 아버지는 계속 두 아들에게 똑같은 메뉴만 시켰다. 이런 반복 훈련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째, 그래도 축구가 너무 재미있었다. 둘째, 아버지가 너무 무서워서 감히 지루하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셋째, ‘필요하니까 하는 거겠지’라는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다.”
“아버지의 이론은 간단했다. 하나가 되어야 둘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양쪽 발로 볼을 마음대로 다룰 줄 알아야 패스도 하고 크로스도 올리고 슛도 때릴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다음에 움직임을 익히고 전술을 배우는 순서였다. 아버지는 나름대로 정한 기준에 다다르기 전까지 두 아들을 절대 다음 단계로 보내지 않았다.”
“어릴 적 축구의 기억이 별로 없다. 기억력 쇠퇴는 아니니까 오해 없길 바란다. 기억에 남는 축구가 없는 이유는 내가 엘리트 축구부에서가 아니라 아버지에게 축구를 배웠기 때문이다. 일반 학업으로 따지면 홈스쿨링인 셈이다. 매일 똑같은 기본기 훈련만 반복했으니까 기억에 남는 장면이 다양할 리가 없다. 볼을 떨어트리지 않고 운동장을 세 바퀴 도는 훈련을 매일 반복했다. 아버지는 기본기를 중시했고, 성적(경기 결과)으로 유소년을 평가하는 지도방식을 정말 싫어하셨다.”
“덕분에 나는 아버지와 훈련하는 동안 경기에 직접 출전하는 일이 드물었다. 또래 축구부 아이들에게 축구가 경기 출전이었다면, 내게 축구는 양발로 볼을 리프팅하고 머리 위에 볼을 세워 균형을 잡는 것이었다. 형과 함께 볼을 떨어트리지 않고 한쪽 발로만 리프팅을 해서 운동장을 누가 빨리 도는지를 겨루곤 했다. 떨어트리면 출발했던 지점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해야 하니 한눈팔 틈이 없었다. 그게 우리의 축구였다.”
“드디어 이벤트가 시작되었다. 참가자도 많았고 이벤트성 대회였던 탓에 각자 슈팅할 기회가 두 번인가 세 번밖에 되지 않았다. 초등부가 먼저 시작했다. 아버지가 알려주신 대로 나는 있는 힘껏 슛을 때렸다. 현장 스태프들이 다들 ‘오~’하며 놀라는 눈치였다. 속성 과외 덕분인지 내가 생각해도 평소보다 슛이 강하게 날아갔다. 정확히 속도가 얼마로 측정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내 슛이 제일 빨랐다. 당당히 초등부 1등을 차지했다. 중학생 형들까지 합쳐도 내 기록이 두 번째로 빨랐다.”
“아버지는 자기 시간을 쪼개면서 작은아들의 뒤치다꺼리를 기꺼이 해주셨다. 전학 절차가 더디자 육민관중학교 축구부 감독을 찾아가 한바탕 벌이기도 하셨다. 복잡한 축구의 길을 계속 고집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헌신 덕분이었다. 집안 사정이 그렇게 어려운데도 아버지는 형과 내게는 꼭 좋은 유니폼과 축구화를 마련해 주셨다. 당신은 구멍 난 양말을 신어도 두 아들에게는 항상 새 양말을 신게 했다.”
“축구 명문에 모인 선수들인 만큼 모두 실력이 뛰어났다. 그렇게 뛰어난 친구들과 경쟁하는 것만큼 재미있고 동기부여가 되는 일은 없다.”
“꼬마 시절부터 꿈이 둘 있었다. 축구선수가 되고 싶다는 꿈, 그리고 유럽에서 뛰어 보고 싶다는 꿈. 거짓말 같겠지만 아버지와 함께 본격적으로 훈련을 시작했던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유럽에서 뛰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였는데 꿈은 일단 크게 가져야 한다는 아버지의 세뇌(?)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중학생 때 아버지가 두툼한 종이 뭉치를 “꼼꼼하게 읽으라”며 건네주셨다. 뭔가 봤더니 해외 유학 프로그램 선배들이 연수 기간에 유럽 현지에서 작성했던 축구 일기였다. 세상과 담을 쌓고 살던 아버지였지만 그런 자료는 기막히게 구해서 아들에게 가져다주셨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 사실은 딱 하나, 부러웠다. 정말 부러웠다. ‘나도 잘할 수 있는데’ 하는 생각에 가슴이 뜨거워지기도 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스스로 유럽 진출 기회를 만들기는 불가능했기에 협회의 해외 유학 프로그램은 내게 유일한 통로였다.”
“쉽게 들릴지 모르지만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외국에서 사춘기 소년이 혼자 버티기란 정말 어렵다.”
“어릴 때부터 양발을 쓸 줄 알아야 한다며 어린 아들을 그렇게 혹독하게 가르쳤던 아버지의 고집 덕분에 나는 왼발을 편하게 사용한다. 지금도 왼발 슛에 더 자신이 있을 정도다.”
“막내아들이 헤헤거리는 동안 아버지가 움직였다. 첫 번째 작업은 독일어 과외였다. 아버지는 ‘독어를 한 마디라도 알고 가는 게 낫다’면서 당장 선생님을 찾아 나섰다. 춘천은 생각보다 작은 도시다. 독일어 과외 선생님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며칠 동안 수소문한 끝에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분을 모실 수 있었다. 아버지는 급한 성격을 뽐내기라도 하듯 수업량을 하루 4시간으로 잡았다. 해야 할 일이 생기면 죽어라 파는 가풍이 재차 진가를 발휘하는 것 같았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과외비가 우리 집 형편에 비해서 턱없이 비쌌다. 부모님께 감사하고 또 죄송할 따름이다.”
“학적 처리를 두고 약간의 갈등을 빚었다. 주위에서는 1년 연수 후의 일을 얘기했다. 한국으로 돌아올 때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축구의 현실을 생각하면 그 조언에도 일리가 있었다. 제도권에서 한 번 밀리면 돌아가기가 쉽지 않다. 아버지는 완강했다. 한국으로 돌아올 생각이면 처음부터 가지도 않는다면서 배수의 진을 쳤다. 엘리트 축구계와 그리 말랑말랑한 사이가 아니었던 아버지는 선수의 신분을 놓고 어른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줄다리기를 극도로 싫어하셨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장기영 대표는 첫 만남에서 나보다 아버지의 험상궂은 얼굴에 더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정말 무서워 보여서 움찔하고 있었는데 그 양반이 갑자기 자기한테 아들을 잘 부탁한다며 90도 인사를 해서 너무 당황했단다. 어떤 느낌인지 내가 아주 잘 안다!”
“아버지는 유학 준비를 하면서 했던 말을 재차 강조하셨다. “민아. 너는 아직 아무것도 이룬 게 없다는 걸 명심해. 네가 그렇게 가고 싶어 했던 유럽에 진짜 갔다고 만족하면 안 돼. 유럽 진출, 프리미어리그라는 꿈이 있잖니. 지금 너는 지금까지 꿈꾸던 곳의 옆 동네까지만 일단 간 거야. 거기서 행복하게 최선을 다하면 정말 꿈 안으로 들어갈 수 있어.””
“아버지가 나를 위해서 그동안 기울였던 지극정성은 값으로 따질 수 없다. 엘리트 코스에서 축구를 배운 기간이 1년 정도밖에 안 되었으니 나의 축구는 온전히 아버지의 작품이었다. 도공이 단 한 개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서 수많은 도자기를 빚고 깨기를 반복해야 한단다. 아버지는 나라는 도자기를 빚기 위해서 아무런 대가 없이 7년 세월을 보냈다. 내가 여기서 자리를 잡지 못한다면 엄청난 불효일 수밖에 없다.”
“구단은 우리 셋을 각기 다른 연령대 팀에 넣었다. 종필이는 16세 팀, 나는 17세 팀, 민혁이 형은 19세 팀으로 찢어졌다. 우리끼리 몰려다니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였다. 그래서 더욱 필사적으로 독일어를 배워야 했다. 구단에서는 학교를 일주일에 사흘만 가도 좋다고 했다. 나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가겠다고 우겼다. 어렵게 잡은 기회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다 해야 한다는 절박함이었다. 수업 내용은 잘 알아듣지 못했다. 훈련과 경기 때문에 힘들기도 했다. 그래도 억지로 참고 학교에 가서 수업을 꾸역꾸역 들었다.”
“동료들의 독일어를 빨리 알아듣고 싶어서 선택한 방법은 ‘다짜고짜 들이대기’였다. 클럽하우스에 들어갈 때마다 큰 목소리로 “구텐 모르겐!”이라고 외쳤다. 처음엔 당연히 창피했다. 그다음에 돌아오는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으니까. 한국이나 독일이나 웃는 얼굴에 침 뱉을 사람은 없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학교 수업에서 새로 배운 표현을 그날 훈련 중에 무조건 써먹었다. ‘예를 들어’라는 말을 배웠다고 치면 17세 팀 아이들과 함께 있다가 갑자기 “예를 들어!”라고 말했다. 독일 아이들은 뜬금없는 들이대기에 “너 그 말 어디서 배웠어?”라며 재미있어했다. 덕분에 한마디라도 더 말을 섞을 수 있었다. 내가 잘못 말하면 고쳐 주기도 했다. 그렇게 독일 친구들과 직접 주고받은 단어나 문장은 신기하게 저절로 외워졌다.”
“마음이 조급했다. 감독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생각보다 우리가 이겨야 한다는 생각이 컸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뛰는 팀이 지는 꼴을 못 본다. 눈물이 많은 이유이기도 한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뭔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울음이 터졌다. 슬퍼서 운다기보다 그냥 눈물이 나온다. 국가대표님 유니폼을 입고 출전했던 메이저 대회에서 눈물을 보인 이유도 결국 그런 성격 때문이었다. 정말 이기고 싶은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온다. 이 버릇은 커서도 고쳐지지 않는다. 2017-18 UEFA 챔피언스리그 16강전에서 유벤투스에 패한 뒤에도 너무 분해서 눈물이 주룩 흘렀다. 이기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경기일수록 더 그렇다.”
“본격적으로 U-17 팀에서 팀 훈련을 시작했다. ‘다짜고짜 들이대기’ 독어 대화 시도가 통했는지 팀 아이들은 경기장 밖에서 내게 잘해 줬다. 문제는 경기장 안이었다. 누가 봐도 쉽게 알 정도로 아이들은 내게 패스를 주지 않았다. 인종 차별이라고 생각하고 싶진 않다. 아이들 사이에서 존재하는 텃세였을 것이다. 연습 경기 중에도 나는 패스를 받지 못해 혼자 뛰다가 끝나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래서 내가 먼저 가서 볼을 빼앗아 오기로 결심했다. 안 주면 내가 직접 챙길 수밖에 없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상대가 볼을 잡을 때마다 과감하게 달려들었다. 남들 눈에는 이런 모습이 ‘투지 넘치는’ 모습으로 보였을 것이다. 경기에서 득점도 조금씩 쌓여 가다 보니까 독일 친구들도 천천히 내게 마음과 패스를 열어 줬다. 내가 좋은 위치로 파고들 때마다 패스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블랙번은 구체적인 계약 방법까지 제안했다. 프로 계약(영국은 만 16세부터 프로 계약을 맺을 수 있다)을 한 뒤에 독일 구단에서 일정 기간 임대로 지내고 돌아오는 방법이었다. 무적 신분이란 불안감에 휩싸였던 나는 그것만으로도 반가웠지만 장기영 대표가 만류했다. 임대 중에 블랙번 안에서 변화가 생기면 쉽게 버려질 수 있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었다. 나를 뽑았던 지도자가 그때까지 블랙번에 남아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유럽에는 그런 식으로 낯선 타지에서 버려지는 유망주가 정말 많다.”
“이제 함부르크 쪽에서 ‘비자만 가져오면 무조건 계약’이라는 약속을 지켜야 했다. 계약서는 이미 완성된 상태였다. 티스와 장기영 대표에 따르면 함부르크는 비자가 나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우리 쪽에서 요구한 각종 조건(시즌 중 한국 왕복 비행기 비용 처리 등)을 전부 합의했었다고 한다. 나의 서명으로 함부르크 최초의 한국인 공식 유소년 선수가 탄생했다. 비자 심사대 앞에서 머리를 쥐어뜯던 시간, 베트남 할머니 직원의 자비, 그리고 유소년 계약 체결이 모두 같은 날에 벌어졌다.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웃음이 나오지만 그때는 정말 서러웠다. 유럽에서 뛴다는 판타지의 실사판은 늘 배고픈 일상이었다.”
“내가 힘든 티를 낼 때마다 아버지는 “성공은 선불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지금 인생을 투자해야 10년, 20년 후에 결과를 거둘 수 있다고. 하지만 그런 아버지도 속내는 안타까움으로 가득했던 것 같다. 결국 고민 끝에 아버지는 한국의 일을 정리하고 독일로 넘어오시기로 했다. 있는 돈, 없는 돈을 전부 끌어다 숙소 근처에서 제일 싼 호텔을 거처로 삼으셨다.”
“아버지는 내가 지내는 클럽하우스 숙소를 직접 보더니 기겁하셨다. 결벽증에 가까운 아버지의 청결 기준에 내가 지내던 방은 거의 쓰레기통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당장  청소부터 하셨다. 침대 매트리스를 들어내 숨은 먼지를 털어내고 물걸레로 방안 구석구석을 일일이 닦았다. 지금도 아버지는 런던 집을 매일 두 시간씩 청소한다. TV 드라마에서 가끔 나오는 그런 대청소를 매일 하신다. 창틀 먼지까지 닦으신다. 진공청소기를 잡는 아버지의 손 부위에는 굳은살이 배겨 있다.”
“아버지는 한국에서 들고 온 밥솥으로 직접 흰쌀밥을 지어 막내아들에게 먹이셨다. 함께 잔뜩 싸 오신 김치와 김만으로도 너무 맛있었다. 남들에게는 보잘것없는 밥상일지 몰라도 내게는 진수성찬이었다. 숙소 규정 때문에 밥솥을 사용한 뒤에는 눈에 띄지 않는 곳에 감춰 둬야 했다. 내가 훈련을 나간 뒤에 아버지는 혼자 내 방에 남아서 밥솥을 옷장 안에 꼭꼭 숨기는 등 궂은일들을 도맡아 하셨다.”
“훈련도 직접 참관하셨다. 아버지는 멀리 떨어져서 꿈쩍하지 않은 채 처음부터 훈련하는 아들을 지켜봤다. 팀 훈련이 끝나고 숙소로 함께 돌아온 아버지는 “이제 근력을 키워야 한다”라면서 작은 체력단련실에서 아들을 챙기셨다. 게으름이나 꾀병을 위한 틈은 없었다. 아버지는 말만 하고 뒷짐 지는 타입의 지도자가 아니다. 모든 근력 운동을 나와 똑같이 하셨다. 심지어 나보다 더 무거운 무게를 들 때도 있었다.”
“나를 위해서 한국에서 날아온 아버지가 눈앞에서 그렇게 열심히 하시는데 내가 게을러질 수는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클럽하우스 체력단련실의 귀신 부자가 되어 갔다. 독일 친구들은 한국인 부자를 신기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께 감사할 뿐이었다. 그때 아버지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나는 중도에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혼자 버티기에는 함부르크 유소년 생활이 너무 외롭고 배고프고 힘들었다.”
“갑자기 판 니스텔로이가 먼저 다가와 “지(Ji, 박지성 선수의 애칭)랑 아는 사이냐?”라고 물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함께 뛰었던 덕분에 판 니스텔로이는 한국인 선수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박지성 선배를 너무 잘 알지만 저쪽에서는 나라는 존재를 알 리가 없지. 박지성 선배나 판 니스텔로이나 내게는 그냥 TV에서나 볼 수 있는 ‘우주대스타’였다. 말 걸어 준 것만도 감사한데 판 니스텔로이는 “너는 특별한 재능을 가졌어. 자신감 있게 열심히 해봐”라고 조언했다. 이 말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실화냐?’”
“촬영장으로 나가기 직전에 화장실에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마침 판 니스텔로이가 들어왔다. 내 어깨를 꽉 잡으면서 “괜찮아. 우리는 널 기다릴 거야”라고 말했다. 참았던 눈물이 펑하고 터지고 말았다. 겨우 참았는데, 정말 무슨 대단한 격려를 해 준 것도 아닌데, 판 니스텔로이의 그 한 마디가 내 속상한 마음을 제대로 찔렀다. 열아홉 살짜리 한국인 신입생이 엉엉 울자 선수들과 스태프가 모두 다가와 어깨를 토닥여 줬다. 한국에 있던 나를 데려가 준 곳, 유소년 계약을 맺어준 곳, 1군 승격 기회를 준 곳, 제일 어린 나의 슬픔을 봄날 햇볕처럼 따뜻하게 감싸 안아 주는 곳. 함부르크는 그런 곳이었다.”
“”호황이면 좋고 불황이면 더 좋다.” 나를 둘러싼 상황이 어두워질 때마다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이다. 글로벌 기업 도요타 자동차의 조 후지오 회장의 어록이다. 원래 뜻은 조금 달라도 나는 이 말을 곤경에 굴복하지 말고 더욱 노력하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꿈같은 1군 데뷔가 눈앞에 왔지만 생각보다 덤덤했다. 빨리 경기를 뒤집어야 한다는 마음이 더 컸다. 경기 중 슈팅도 날리고 공격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면서 애를 썼지만 2-5로 패하며 결국 컵대회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유럽 프로 데뷔전이었다는 만족감은 딱히 없었다. 졌다는 게 분할 뿐이었다.”
“골인. 마인 에르스테스 토어(Mein erstes tor, 나의 첫 골). 함부르크 역대 최연소 득점 신기록. 노력에 대한 보상. 가족에게 바치는 선물. 2010년 10월 30일이었다.”
“나의 분데스리가 데뷔골은 팀의 2-3 패배로 빛이 바랬다. 허망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뛰는 가슴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열아홉 살인 내가 그 유명한 분데스리가에서 골을 넣었다. 유소년 계약 1년 만에 말이다. 경기 후 선수단은 곧바로 함부르크로 돌아왔다. 클럽하우스 숙소에 도착했을 땐 이미 새벽 2시가 넘었다. 아버지가 호텔로 돌아가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텅 빈 집에 혼자 들어가는 기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항상 문을 열고 들어가면 누군가가 반겨 주기를 바란다. 그런 성격을 잘 아시는 아버지는 그때도 지금도 내가 귀가할 때까지 주무시지 않는다. 울컥하는 마음에 아버지와 포옹했다. 아버지의 반응은 고요했다. 작은 목소리로 “수고했다. 어서 쉬어라. 다음 경기 준비해야지”라고만 하실 뿐이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눈치를 보며 짐을 풀었다. 아버지는 내가 쓰던 노트북을 집어 들고는 “오늘 이건 내가 가져가마”라고 조용히 말했다. 프로 데뷔골에 대한 인터넷 반응을 구경하면서 웃으며 잠들고 싶었는데. 아버지는 “흥민아. 축구선수한테 제일 무서운 게 교만이야. 한 골 넣었다고 세상은 달라지지 않아. 지금 네가 할 일은 다음 경기 준비야. 내일 보자”라면서 방을 나가셨다. 갑자기 방이 휑하게 느껴졌다. 분데스리가 데뷔골의 감흥을 즐길 방법이 전혀 없었다. 최근에야 아버지는 그때 이야기를 하신다. 싸구려 호텔 방으로 돌아가면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기도를 하셨단다. “하느님, 흥민이가 오늘 하루만 기억상실증에 걸리게 해 주세요”라는 기도. 아들의 프로 데뷔골에 대한 기쁨보다 어린 내가 자만할지 모른다는 걱정이 앞선 것이다.”
“에이전트인 티스도 마찬가지였다. 쾰른전 현장에 있던 티스는 경기가 끝나자 구단 공식 홈페이지를 제외한 모든 언론 인터뷰를 금지시켰다. 어린 나를 들뜨게 해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인터넷 반응은 구경도 못 한 채 나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그때까지 유소년 신분이었던 나는 보수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1군 선수가 되고, 분데스리가에서 골을 넣고, 함부르크 팬들을 열광시킬 때도 나와 아버지는 별 볼 일 없는 살림 속에서 어렵게 지냈다. 가족과 함께 지낼 집도 없었고 아버지는 자동차가 없어서 매일 호텔과 클럽하우스, 훈련장 사이를 몇 시간씩 걸어 다녔다. 유소년 때와 다르게 1군 훈련장에는 가족도 출입할 수가 없었다. 훈련이 시작되면 갈 곳이 없어진 아버지는 혼자 밖에서 몇 시간씩 추위를 견디며 기다리셨다. 비를 피할 곳도 없었다. 훈련을 마친 나를 챙겨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냥 버티셨다.”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해트트릭 욕심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이기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때문에 경기가 끝나고 정말 분통이 터졌다.”
“내가 골을 넣을수록 아버지는 더 노심초사했다. 들뜨지 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다. 그리스 신화의 이카로스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다. 이카로스가 너무 높이 날지 말라는 아버지 다이달로스의 경고를 망각한 채 하늘 높이 떠올랐다가 태양의 열기에 날개를 붙였던 밀랍이 녹아 바다로 떨어져 죽었다는 이야기다.”
“팀 동료인 판 니스텔로이도 대화 소재로 등장했다. 함부르크에서 함께 식사를 하던 자리에서 판 니스텔로이는 내게 “지(Ji, 박지성 선배의 애칭)는 A매치 일정으로 20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오가느라 지칠 텐데 영국으로 돌아온 다음 날도 미친 듯이 뛰어다닌다”라면서 웃었던 적이 있다.”
“코칭스태프가 승부차기 순서를 알렸다. 내가 네 번째 키커였다. 긴장 속에서 시작된 승부차기는 허망하게 우리의 3 연속 실축으로 끝나고 말했다. 나는 승부차기에 나설 기회도 없이 패배를 받아들여야 했다.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어릴 때부터 나는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이길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었던 경기에서 졌을 때 울음을 터트리곤 했다. 한일전이 시작되고 경기가 끝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나는 패배를 단 1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일본에 결승행 티켓을 넘겨줘서, 한 번도 패하지 않았는데도 결승에 오르지 못해서, 나를 응원해 준 가족에게 미안해서 눈물을 참기가 어려웠다. 내 마음속에 영원히 남을 한국 축구의 영웅들과 함께했던 첫 메이저 대회는 그렇게 끝났다.”
“만 하루도 되지 않아 독일행 비행기를 탔다. 아버지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내가 너무 들떠 있다고 했다. 아시안컵에 출전하면서 스타 선배들과 얼굴을 익혔다고 해서, 국내 팬들의 반응이 뜨겁다고 해서, 함부르크 안에서 상황이 조금 좋아졌다고 해서 교만해지면 안 된다고 꾸중을 들었다. 건방 떨지 말고 새로 시작하라는 충고는 회초리보다 더 따끔했다. 스스로 느낀 바가 없지 않아 새겨듣기로 마음먹었다.”
“불어난 체중이 숫자로 표시되자 스스로 큰 충격을 받았다. 주위에 있는 모든 분이 ‘체중 게이트’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특히 소식을 접한 아버지의 두 눈에서는 분노의 불길이 치솟았다. 평소 “조금 좋다고 꼴값 떨고 교만해지고 나대면 안 된다. 반대로 조금 상황이 힘들다고 소심하게 있을 것도 아니다. 항상 자기 선을 지켜야 한다”라고 그렇게 강조했던 부분이 내 안에서 아시안컵에 다녀온 딱 한 달 만에 와장창 무너졌기 때문이다.”
“몸은 무겁고 경기도 풀리지 않는 상태로 2010-11 시즌이 막을 내렸다. 개인 기록은 시즌 15경기(선발 8회) 3골이었다. 만족할 만한 기록은 아니어도, 프로 데뷔전에서 골을 넣었고 국가대표팀에 뽑혀 아시안컵에도 다녀왔다. 타지에서 2년 넘게 버틴 고생을 생각하면 나름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했다. 하루라도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가족도 그리웠고 집밥도 실컷 먹고 싶었다. 아시안컵에서 친해진 형들과 만나서 놀고도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아버지를 설득해야 했다. 시즌이 끝나갈 즈음 아버지가 “나는 자존심 상해서 못 돌아간다”라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아시안컵 직후 무너진 밸런스와 (SNS의 재미를 알아 버린?) 나의 달라진 태도가 아버지의 분노를 샀다. 아버지가 무서워서 나는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는 말은 꺼내지도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았다.”
“귀국하자마자 춘천으로 갔다. 대표팀에서 알게 된 선후배, 친구들에게는 일단 나중에 보자고 메시지를 남겼다. 아버지의 훈련이 영원히 이어지진 않을 테니까. 독일로 돌아가기 전에 휴가를 즐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엄청난 착각이었다. 다음 날부터 나는 죽었다. 아침 8시에 밥을 먹고 체력 단련장에 가서 아버지와 함께 근력 운동을 했다. 그리고는 뒷산의 높다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했다. 웨이트가 끝나면 운동장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축구공 20개를 들고 내 앞에 나타났다. 나는 위치를 옮겨 가면서 슛을 때리기 시작했다. 매일 1천 개씩. 그렇다. 1천 개다. 같은 골문을 향해서 오른발 500번, 왼발 500번 슛을 때렸다. 내가 슛 능력을 타고났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전혀 사실이 아니다. 나의 슈팅은 2011년 여름 지옥훈련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성미 급한 초여름 햇살이 내 정수리를 열정적으로 찔러 댔다. 죽을 것 같았다. 정말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땀을 너무 많이 흘려서 어지러웠다. 눈앞이 흐려졌다. 슈퍼마켓에서 사 온 초콜릿과 바나나를 입안에 욱여넣어 떨어진 당을 채웠다. 서 있기만 해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훈련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면 저녁을 먹자마자 쓰러져 자기 바빴다. 스마트폰을 들어 올릴 힘조차도 남아 있지 않았다. SNS는 끊긴 지 오래였다. 대표팀 형들의 각종 경조사도 모두 스킵했다. 혹시나 사람들이 내가 건방 떤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걱정도 들었다. 누워서 그런 걱정을 하다가 이내 잠에 곯아떨어졌다. 다음 날 일어나면 지옥훈련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렇게 5주를 보냈다. 하루도 쉬지 않았다. 함부르크의 여름 프리시즌 훈련 일정에 맞춰 독일로 향했다. 아버지는 다른 일이 있었던 탓에 나 혼자 비행기에 올랐다. 5주 훈련은 지옥 같았지만 그 과정을 버틴 몸은 천국의 날개 달린 천사처럼 가벼웠다. 살면서 이런 컨디션은 처음이었다. 함부르크 국제공항에 내리자 익숙한 독일의 공기 내음이 몸 안으로 들어왔다. 분데스리가로 돌아왔다는 실감이 확실했다. 힘든 기억밖에 없어도 익숙한 감정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롤러코스터에는 변치 않는 사실이 하나 있다. 올라가면 금방 떨어진다. 반대로 떨어지기가 무섭게 하늘로 솟구치고. 우리 인생도 롤러코스터와 닮은 구석이 있는 것 같다. 좋은 일만 있는 삶은 없다. 그 대신에 무슨 일이든 좋게 생각하려고 노력할 수는 있다. 춘천의 지옥훈련은 내게 최상의 컨디션을 선물했다. 체중이 줄고 근력을 키웠으니 그라운드에서 몸이 날아갈 것 같았다. 훈련과 연습 경기에서 내 페이스를 따라올 상대가 없었다. 프리시즌에 뛰었던 6경기에서 나는 15골을 몰아쳤다. 최강 바이에른 뮌헨을 상대로도 두 골을 넣었다. 코칭스태프를 비롯해 구단 식구들 모두 이런 나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시간이 흐른 뒤에 들은 이야기가 있다. 첫 시즌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갈 때 구단에서는 나를 거의 포기했다고 한다. 내부적으로 ‘손흥민은 이제 끝났다. 저렇게 불어난 체중에 휴가까지 다녀오면 절대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한다’라고 진단했다. ‘반짝 유망주’로 끝날 것이라는 자체 판단이었다. 에이전트인 티스는 이런 분위기에 관해서 우리 가족에게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다행히 나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돌아왔다. 구단에서는 나의 격변이 큰 화제였다. 아버지의 지옥훈련 내용을 살짝 알려주자 다들 혀를 내둘렀다. 구단에서는 “아버지가 너를 살렸다”라고 말했다. 나는 ‘반짝 유망주’로 끝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렇게 끝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평소대로 생활하려는 아버지의 모습도 안쓰러웠다. 아버지는 항상 “대들보가 휘면 기둥이 휜다”라고 말씀하신다. 지금도 아들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며 수도승처럼 생활하신다. 그런 아버지의 수심 가득한 표정을 가만히 지켜보기 힘들었다.”
“이를 악물고 버텼다. 아버지는 “좌절하지 말고 24시간 준비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프로의 자세”라며 강한 정신력을 주문하셨다. 그러나 프로답게 멘탈을 유지해야 한다고 매번 다짐해도 막상 경기에 출전하지 못해 어깨에서 힘이 쭉 빠진 채 집으로 돌아오기 일쑤였다.”
“31라운드 하노버전에서 드디어 내가 선발 출전 기회를 얻었다. 마지막 선발(지난해 12월 4일)로부터 세어 보니 무려 132일 만이었다. 나도 팀도 물러날 곳이 없었다. 마침 한국을 다녀온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아빠, 감이 너무 좋아. 골 넣을 것 같아”라고 얘기했다. 겨우 선발 기회를 얻은 백업 주제에 그런 자신감이 어디서 나왔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세상 어디에나 편견이 있다. 유럽에 온 한국인 선수는 ‘축구 못하는 동네에서 온 녀석’이라는 편견을 극복해야 한다. 유럽 기준으로 동양 선수들은 의사 표현이 소극적인 편이어서 만만하게 보기도 한다. 인종 차별과는 약간 다르다. 유럽의 ‘축구 부심’이 샛길로 빠졌다고 해야 할까. 나도 독일에 처음 왔을 때 그런 편견과 싸워야 했다. 팀 동료들은 내게 패스를 주지 않았다. 말도 잘 걸지 않았다. 내가 먼저 가서 볼을 빼앗아 와야 했고, 내가 먼저 다가가 독일어로 말을 걸어야 했다. 마음의 담을 무너트리려면 경기장 안에서는 실력을 입증해야 하고, 밖에서는 ‘내가 너희 문화를 배우려고 노력 중이다’라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가끔 세게 나가야 할 때도 있다. 예를 들어 소위 ‘썩은 사과’와 맞닥뜨릴 때다. 한국이든 독일이든 ‘썩은 사과’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강하게 나가야 한다. 내가 행동하려는 의지가 있다는 사실을 상대에게 분명히 알려야 한다.”
“이후 한 골씩 주고받아 2-1이 된 후반 14분 내가 하프라인 근처에서 패스를 받았다. 앞뒤 재지 않고 드넓게 펼쳐진 공간을 향해 돌진했다. 커트인, 한 명, 두 명, 왼발 슛, 골인. 기뻤다. 1년 전 춘천 뙤약볕 아래서 현기증이 나도록 반복했던 딱 그 지점이었다. 골을 넣은 나는 곧바로 핑크 감독님에게 가서 안겼다. 이 정도면 꽤 괜찮은 보은 사례 아니겠는가! 도르트문트전 3-2 승리야말로 우리 시즌의 진짜 시작이었다.”
“사실 나는 경기에 매번 뛸 수 있는 함부르크에서 행복했다. 언제 어디서든 나의 최우선 기준은 출전 여부다. 축구 선수는 뛸 때가 제일 행복하다. 아무리 빅클럽이라고 해도 벤치에만 앉아있으면 의미가 없다. 내게 처음 기회를 준 곳도 함부르크다. 지금처럼 매 경기 뛸 수 있으면 그걸로 대만족이었다. 이곳에서 더 잘하고 싶었다.”
“함부르크에서 주전으로 꾸준히 활약하자 유럽 각지에서 많은 오퍼가 왔다. 내가 그렇게도 꿈꿨던 프리미어리그 구단들도 구체적인 관심을 나타내며 접근했다. 마음 같아선 덥석 물고 싶었다. 다행히 티스와 장기영 대표는 나보다 훨씬 냉철했다. 우리는 한데 모여서 각자의 의견을 모았다. 결론을 내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첫째, 뛸 수 있는 팀이어야 한다. 둘째, UEFA 챔피언스리그처럼 큰 대회를 경험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연봉은 상관없었다. 돈은 항상 나의 목표가 아니라 내가 잘해서 따라오는 보너스라고 생각했다. 만약 함부르크가 다음 시즌 유럽 대회 출전권을 따면 남아도 상관없었다. 함부르크와의 재계약 협상, 타 구단의 제안 검토 등을 에이전트에게 맡기고 나의 안테나는 그라운드에 고정했다.”
“독일에 와서 신기했던 것이 있다. 어딜 가나 이곳 사람들이 차범근 감독님을 안다는 사실이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차 감독님이 레버쿠젠에서 마지막으로 출전했을 때가 1988-89 시즌이었다. 좋은 음악도 1년만 흐르면 잊히는 판에 30년이 지나서까지 기억되는 축구선수라니 놀라울 뿐이다.”
“언론에서 나를 감독님과 비교할 때마다 죄송한 마음이 앞선다. 1970년대, 80년대의 축구 환경은 지금보다 훨씬 열악했을 것이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 내가 100골 넘게 넣을 수 있었을까? 감독님의 천금 동점골이 있었던 1987-88 시즌 UEFA컵 우승이 지금까지 레버쿠젠의 유일한 유럽 타이틀이다.”
“레버쿠젠으로 이적하면서 아버지는 “겸손해야 한다”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성공 안에서 길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조언도 빠지지 않았다.”
“유럽으로 가는 기회를 잡았을 때, 함부르크에서 처음 프로 계약을 맺었을 때, 국가대표팀에 처음 선발되었을 때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메시지가 바로 겸손이었다. 항상 상대방을 높이고 자신을 낮춰야 한다는 말씀도 나는 지금까지 실천하려고 노력한다. 레버쿠젠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돈이 아니라 나의 축구였다. 간단한 결론이다. 무거워진 통장은 그냥 겉모습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축구를 뛰어난 동료들과 함께 행복하게 즐기는 삶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골이란 지독하게 들어가지 않다가도 한 번 들어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주 쉽게 들어가곤 한다.”
“유럽 대회에 출전하는 팀의 선수라면 출전, 회복, 휴식으로 구성되는 나만의 시즌 사이클을 갖고 있어야 한다.”
“가족 외에 내게 힘을 주는 존재가 있다. 팬이다. 내가 제일 소름 돋을 때가 언제인지 고백하면, 주말 경기에서 골을 넣으면 한국에 있는 팬들이 월요일에 출근하면서 너무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내 골 동영상을 보면서 좋아하고, 학교나 직장에서 친구, 동료들과 함께 내 골을 이야기한단다. 처음 그 말을 전해 들었을 때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사실 이런 말을 하는 지금도 소름이 돋는다. 타인을 행복하게 하는 일이야말로 개인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성취라고 생각한다. 나도 2002년 4강 신화를 보면서 너무 행복했다. 지성이 형이 뛰는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보면서도 가슴이 쿵쾅거렸다. 지금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경험을 선물하고 있다니. 내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기분이 좋다. 항상 팬들에게 감사하면서 지낸다. 믿을지 모르겠지만 이 역시 무뚝뚝한 아버지의 가르침이 만들어 준 마음가짐이다. 아버지는 “이렇게 팬들이 좋아해 주는 것도 현역으로 뛸 때 잠깐이다. 은퇴하면 아무도 너를 찾지 않을 거다. 관심 가져 줄 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인이든 기념 촬영이든 최대한 열심히 해 드려야 한다”라고 항상 말씀하신다.”
“레버쿠젠 시절의 일이다. 주중 저녁에 치른 챔피언스리그 경기가 끝나고 귀가하려는데 경기장 밖에 족히 백 명이 넘어 보이는 팬들이 보였다. 차를 타고 나가면서 보니까 전부 나를 기다린 한국 팬들이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나 한 명을 보기 위해 낯선 곳에서 기다린 분들이라고 생각하니까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팬 서비스에 관한 또 하나의 원칙이 있다. 천재지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어린이와 몸이 불편하신 팬의 요청은 백 퍼센트 받아 드린다. 한국의 어느 대학교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비공개 스케줄이었기 때문에 별생각 없이 현장에 갔는데 어느 순간 우리 일행의 차가 아예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로 인파가 몰렸다. 팬들의 안전이 심각하게 걱정될 정도로 삽시간에 벌어진 상황이었다. 꼼짝없이 차 안에 갇힌 상태로 고민하던 차에 아버지가 갑자기 차문을 열고 현장 스태프를 불렀다. “저기 저 아이랑 저분이 들고 있는 것 좀 가져다주세요.” 무슨 일인지 봤더니 휠체어를 탄 팬과 어린이가 인파 탓에 뒤쪽으로 밀려 있었다. 현장 스태프가 인파를 뚫고 그 팬들이 들고 있던 종이와 축구공을 받아왔다. 아버지는 “지금 밖에 나가진 못해도 이건 꼭 해드려야 할 것 같다. 빨리 사인해라”라면서 공을 내게 주셨다. 또 언제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토트넘 경기를 끝내고 관중석에서 ‘셔츠 좀 갖다 주세요’라고 한글로 쓴 피켓을 들고 응원하는 외국인 꼬마를 본 적이 있다. 말해 뭐 하겠는가. 당첨이다.”
“브라질로 가는 나의 키워드는 자신감이었다. 말도 통하지 않는 독일 함부르크에서 나는 아무것도 없이 시작해서 프로선수가 되었고, 골을 넣었고,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뛰는 선수가 되었다. 기본 문법부터 시작한 독일어는 이제 공식 기자회견에 나설 정도로 익숙해졌다. 이번 변화는 운이 좋아서 얻어걸린 게 아니다. 모두 피와 땀과 노력과 맞바꾼 결과물이었다.”
“우리를 꺾은 알제리와 벨기에 선수들이 경기 후 자국 팬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았다. 브라질까지 찾아와 우리를 응원해 준, 우리의 승리를 기대해 준, 늦은 시간까지 한국에서 우리를 응원해 준 국민들께 죄송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평소 내 입에서 나오는 ‘국가대표의 책임감’이라는 말은 순도 100% 진심이다. 나는 태극마크가 자랑스럽고 조국을 대표해서 뛰는 일을 인생 최고의 영광이라고 굳게 믿는다. 나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스스로 태극마크를 반납할 생각이 없다. 국가대표는 내가 먼저 고사할 수 있는 팀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내게 있어서 국가대표팀은 절대선이다. 소속팀과 마찬가지로 대표님 경기에서 나오는 나의 골과 우리의 승리로 한국 축구 팬 모두를 행복하게 해드리는 것보다 기쁜 일은 없다. 그 책임을 다하지 못했을 때, 국가 대 국가로 맞붙은 대결에서 무릎을 꿇었을 때, 국민 모두를 실망시켰을 때 내 마음은 갈가리 찢어진다. 브라질 월드컵은 내게 그런 경험으로 남게 되었다.”
“러시아와 알제리, 벨기에의 선수들을 차례로 상대하면서 내가 목격했던 그들의 눈빛을 절대 잊을 수가 없다. 나도 나름대로 각오를 다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라운드 위에서 만난 상대 선수들의 눈빛은 그야말로 활활 불타고 있었다.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의 눈빛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그라운드에서 그렇게 투지에 불타는 눈빛을 본 적이 없었다. 우리는 투철한 정신력이 한국 축구의 전통이라는 말을 귀가 따갑도록 듣는다. 월드컵에 가서 싸워 보니 그곳에 모인 32개국 모든 선수가 전쟁터에 나서는 마음가짐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훈련 시간이 부족한 각국 대표팀들이 출전하는 월드컵에서 그토록 멋진 플레이와 명승부가 속출하는 이유를 말이다. 브라질에서 우리는 처절한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우울함 속에서 나를 지켜 준 것은 축구였다. 나는 축구를 좋아한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좋아한다. 쉴 때도 나는 축구 영상을 찾아본다. 내 경기 영상도 자주 본다. 상황마다 다른 판단을 했을 때를 상상해 본다. 다른 팀이나 선수의 영상을 보면서 잘한 부분과 못한 부분을 찾아내며 공부한다. 훈련과 경기를 위해서 그라운드 안에 들어가 있는 시간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다. 어제 경기에서 져도, 파파라치 컷으로 곤욕을 치러도, 다른 엉뚱한 일들이 끊이지 않아도 일단 축구화를 신고 잔디 위에서 축구공을 차는 순간 머릿속에 있던 모든 잡념이 사라진다. 내가 제일 자랄 수 있는 것도 축구,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도 축구다. 축구만 할 수 있다면 나는 매일 새롭게 태어난다. 컴퓨터를 리부팅하면 속도가 빨라지는 그런 느낌이다.”
“‘오늘 최선을 다해 행복해야 한다’라는 아버지의 신념도 나를 지켜 준 원동력이었다. 어제의 일을 계속 끌어안거나 내일을 걱정하는 토에 오늘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오늘 행복하지 못한 사람은 내일이 되어도 불행하기는 마찬가지다. 독일 유소년 시절부터 그렇게 자기 암시를 해왔다. 지금 나는 행복하다,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기회가 아니다, 이 기회를 절대 놓쳐선 안 된다, 오늘 나의 축구는 행복하고 즐거워야 한다고 속으로 되뇌었다.”
“경기 시작 전에 나는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로 나가서 홈 팬들과 첫인사를 나눴다. 3만 6천 관중의 열렬한 환영이 눈과 귀, 피부로 생생하게 와 닿아 소름이 돋았다. 고등학교 1학년 나이로 집을 떠났던 2008년 8월로부터 정확히 7년 후, 내가 프리미어리그 그라운드에서 잉글랜드 팬들로부터 큰 박수를 받고 있었다.”
“시즌 중 나의 일과는 간단하다. 7시 30분에 일어난다. 잠이 많아서 매번 아버지가 깨워 주신다. 가벼운 아침 식사를 한다. 과일, 꿀, 홍삼, 우유 반 컵으로 시장기만 없애고 직접 차를 몰아 훈련장으로 출근한다. 훈련은 보통 오전 10시나 10시 반부터 시작하지만 나는 항상 9시까지 훈련장에 도착한다. 훈련에서 최고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체중을 재고 체력 단련실에서 가볍게 몸을 푼다.”
“내가 먹는 영양제(?)는 꿀과 홍삼, 우유가 전부다.”
“프리시즌이 시작되는 7월부터 시즌이 끝나는 이듬해 5월까지 대략 10개월 조금 넘게 나는 매일 이 생활 패턴을 유지한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이렇게 10개월을 살기가 쉽지 않다. 솔직히 정말 어렵다. 못 믿겠다면 한번 시도해보셔도 좋다. 10개월 내내 저녁 10시 전에 잠자기. 10개월 내내 정크푸드 먹지 않기. 10개월 내내 자유 시간에 외출하지 않고 집에서 쉬기. 10개월 내내 스트레스를 빨리 털고 평정심을 유지하기.”
“오늘 만족하지 않고 내일 더 잘하고 싶다. 오늘 훈련보다 내일 훈련에서 더 잘하고 싶다. 다가오는 경기에서 이길 수 있게 팀을 돕고 싶다. 훈련이든 경기든 나는 최고가 되고 싶다. 그래야 프리미어리그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뛰는 기회를 허투루 낭비하고 싶지 않다. 이렇게 뛸 수 있는 현역 시간도 아주 짧다. 그 값을 치러야 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첫 훈련을 위해 토트넘의 훈련장으로 갔다. 다시 한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훈련 시설과 규모는 정말 엄청났다. 천연 잔디 구장만 15개 면, 인조 잔디 1.5개 면, 그리고 실내 풋살 구장이 설치되어 있다. 프로 구단의 훈련장이 국가대표팀이 사용하는 파주 트레이닝센터보다 거의 세 배 가까이 크다니 믿기가 어려웠다.”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기지만, 지난 시즌 포체티노 감독님은 나의 에이전트와 아버지까지 런던으로 초청했었다. 아버지는 “시즌 중에 자꾸 이런 일로 내가 움직이면 흥민이 마음이 들뜰 수 있다”라고 고사했기 때문에 에이전트 두 분만 런던에서 포체티노 감독님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감독님은 직접 준비한 내 플레이 영상을 보여 주면서 “바로 이런 플레이가 지금 내 축구에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흥미로운 점은 득점보다도 상대 수비를 허물거나 오프 더 볼(off-the-ball, 볼이 없는 상태) 움직임을 담은 장면들이었다고 한다. 단순히 ‘골 잘 넣는 선수’가 아니라 ‘딱 맞는 스타일의 선수’라는 감독님의 진심이 티스와 장기영 대표에게 뚜렷이 전달되었던 것이다.”
“프리미어리그 경기의 출전 명단에 들어갈 수 있는 인원은 팀당 18명이다. 11명이 선발 출전하고, 벤치에 앉은 7명 중에서 3명만 교체로 들어갈 수 있다. 나머지 4명은 1초도 뛰지 못한다. 뛴 시간이 짧거나 아예 출전하지 못한 선수들은 경기가 끝난 그라운드에 남아서 보충 훈련을 해야 한다. 컨디션 유지를 위해서 필수적인 과정이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보충 훈련이 너무 괴롭다. 훈련이 힘들어서가 아니다. 처량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아느냐고? 토트넘 이적 첫 시즌에 내가 그 보충 훈련을 아주 많이 해봐서 잘 안다.”
“영어 적응도 순조로웠다. 아무래도 독일어에 능통하다는 점이 플러스 요인이 되었다. 처음에는 동료들의 빠른 영국식 억양을 알아듣기가 쉽지 않았다. 모르는 말이 나오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물어봤다. 영어를 빨리 배우려는 나의 노력은 동료들에게도 좋은 인상을 줬다. 그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려는 자세에서 존중이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는 게 상책이다. 구단에서 요구하는 영어 테스트가 있었는데 나는 시즌 전반기에 이미 통과했다. 구단에서는 외국인 중 최단 시간 합격이라며 나의 영어 습득 속도를 반겼다.”
“부상자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통증이 아니다. 주전 경쟁에서 뒤처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다. 영국의 어느 스포츠 전공 교수가 발표한 논문을 본 적이 있다. 부상으로 결장한 프로 선수들과 대면 인터뷰를 통해서 심리를 연구한 내용이었다. 설문 내용 중에서 가장 많은 대답이 ‘분노’였다. 본인의 부상으로 기회를 얻은 동료가 못하기를 바란다는 대답도 꽤 많았다고 한다. 5년 전 함부르크 1군으로 승격하자마자 발가락이 부러졌을 때 나도 기회를 잃을까 봐 펑펑 울었다. 내가 없는 동안 내 포지션에서 뛰는 동료의 플레이를 바라보는 마음은 정말 복잡하다. 동료와 팀이 잘해 주길 바라는 소망과 나의 공백이 컸으면 하는 이기심이 마구 뒤섞인다. 밥그릇을 빼앗겼다는 생각이 크기 때문이다.”
“지금 감사하며 즐겨야 한다. 나의 행복 철학이다. 그라운드에 서서 축구공과 함께 있는 순간을 최대한 즐기는 것이 행복이다. 어제를 떨치지 못하거나 내일을 걱정하는 삶은 오늘의 행복을 방해한다. 영국에서 나는 ‘스마일 보이’라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동료들도 “어떻게 너는 매일 아침 웃으면서 돌아다닐 수 있는 거냐?”라면서 신기해한다. 간단하다. 웃어서 행복한 거다. 매일 아침 일어나서 ‘오늘 하루도 행복하게’라고 다짐한다.”
“몸값은 숫자일 뿐 내 자리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
“가슴앓이 끝에 감독님을 찾아갔다. 축구선수가 되어 내가 먼저 보스를 찾아간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시즌 내내 내 안에 쌓인 응어리가 너무 커져서 화병이 날 것만 같았다. 내가 왜 선발로 출전하지 못하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지, 앞으로 내가 어떻게 하면 될지를 물었다. 무엇보다 팀이 나를 필요로 하는지가 궁금했다.”
“케인이 빠진 채로 나선 미들즈브러전에서 나는 전반전에만 두 골을 몰아쳤다. 두 번째 골은 사실 너무 잘 맞아서 나도 깜빡 놀랐다. 페널티박스 안 왼쪽에서 빼앗긴 볼을 다시 가져온 뒤에 오른발로 감아 찬 슛이었다. 슛을 때릴 때 골대를 보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그린 가상의 골대를 향해 찼는데 정확히 반대편에 꽂혔다. 계속 강조하지만 ‘손흥민 존’은 재능이 아니라 훈련의 결과다. 2011년 여름의 지옥 훈련을 시작으로, 시즌 중에도 일정 기간 이상 선발로 출전하지 못할 때마다 아버지와 나는 따로 슈팅 훈련을 가졌다. 함부르크 두 번째 시즌에는 6개월 동안 매일 슈팅 훈련을 하기도 했다. 미들즈브러전의 두 번째 골이 그 결실이다.”
“프리미어리그는 세계 최고의 프로축구리그다. 전 세계에서 볼을 가장 잘 찬다는 선수들이 득실대는 곳에서 이런 상을 받았다는 사실이 정말 뿌듯했다.”
“나는 항상 내 기록을 챙긴다. 지난 시즌보다 잘하는 것이 기본 목표이기 때문이다.”
“나는 축구 영상을 자주 본다. 집에서 쉴 때도 대부분 게임을 하든가 축구 영상을 보든가 둘 중 하나다. 일을 도와주러 런던에 오는 나의 크루들한테 핀잔을 들을 때가 많다. “야, 내가 너 일 도와주려고 런던까지 왔는데 넌 축구만 보냐?”라면서. 나도 모르게 내가 스마트폰으로 축구를 보고 있던 것이다. 김유신의 말도 아니고 참 곤란한다. 이런 증상을 보통 중독이라고 하던데. 그래, ‘덕후’라고 표현해도 좋겠다. 내가 축구를 보는 이유는 두 가지. 우선 재미있다. 토트넘의 리그 라이벌이나 외국 빅클럽들의 경기를 챙겨 본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리오넬 메시의 플레이를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빠져든다. 국가대표팀 동료들의 경기는 하이라이트로 챙긴다. K리그도 판세나 주요 이슈 정도는 알고 있다. 유튜브에 올라온 축구 콘텐츠를 혼자 보면서 낄낄거리기도 한다. 평범한 ‘축빠’를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겠다. 두 번째 이유는 좀 진지하다. 공부하기 위해서 본다. 나는 축구 영상을 보면서 정말 많이 배운다. 호날두, 메시, 네이마르, 포그바 등의 플레이를 보면서 배운다. 결정적 참고서는 내 플레이 영상이다. 사실 팬들이 편집해서 올린 골 모음 영상도 몇 번씩 돌려 본다. 기분이 좋아지는 효과도 있고, ‘저기서 다르게 해 볼 수도 있겠다’라면서 이미지 트레이닝도 한다.”
“영상으로나 혹은 관중석에서 축구를 보면 훨씬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실제 경기 안에서는 모든 게 너무 빠르게 돌아간다. 0.0001초의 차이로 성패가 갈리기 때문에 이것저것 고민하거나 잴 여유가 없다. 그걸 영상으로 보면 피치 위에서 생각하지 못했던 옵션들을 찾아낼 수 있다. 그게 정말 큰 공부가 된다. 실제로 다음에 비슷한 상황에 생길 때 써먹어 보는 힌트도 많다. 인터뷰에서 내가 “더 공부해야 한다”라는 말을 자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무리 내가 잘했던 장면도 영상으로 보면 더 잘할 수 있는 여지가 보인다. 21골을 넣었던 2016-17 시즌 헐시티와의 최종전을 마친 날 나는 다음 날 동이 틀 때까지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더 잘할 수 있었던 여지, 수많은 틈이 자꾸 생각났기 때문이다.”
“터덜터덜 라커룸으로 걸어가는데 이란의 케이로즈 감독이 나를 반겼다. 아시아 무대에서 만날 때마다 케이로즈 감독은 항상 내게 “너는 좋은 선수다. 행운을 빈다”라고 칭찬해 줬다. 이날 케이로즈 감독은 내 유니폼을 부탁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도자로부터 직접 이런 부탁을 받자니 놀랍고 영광이었다. 경기 결과와 잔디 탓에 날이 잔뜩 섰던 기분이 조금이나마 누그러졌다.”
“올 초부터 방송사 티비엔(tvN)의 다큐멘터리를 찍었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다큐멘터리는 한두 시간에 뚝딱 끝나는 촬영이 아니다. 사흘에 한 경기씩 치르는 일정이 시작되면 다른 일을 할 시간이 아예 없다. 그래도 큰 맘먹고 이번 다큐멘터리를 찍기로 했다. 기록물이기 때문이다. 소소한 일상으로 시작해서 프리미어리그에서 경쟁하기 위해 내가 기울이는 노력을 담고 싶었다. 제일 큰 바람은 축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이다. 나는 이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 내가 아니라 축구 자체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걸 보면서 아이들이 축구 배우고 싶어 했으면 좋겠고, 축구에 관심이 없던 분들의 옆구리도 쿡쿡 찌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아시다시피 지금 한국 축구의 분위기는 따뜻해졌다. ‘있을 때 더 잘해야 한다’는 성용이 형의 말을 기억한다. 더 많은 사람이 축구를 좋아하면 좋겠다. 영국처럼 한국에서도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평소 관심사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주말이 되면 온 가족이 축구 유니폼을 맞춰 입고 함께 경기장으로 가는 광경을 한국에서도 볼 수 있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런 축구 문화가 피어날 수 있도록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다큐멘터리라는, 내게는 너무 거창한 일을 하기로 했다.”
“가끔은 친구가 그리워지기도 한다. 나도 사람이라서 힘들거나 괴로울 때가 생긴다. 성격상 나는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힘들다고 말하면 더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그 말을 듣는 사람도 힘들게 한다. 나는 주위를 힘들게 하거나 폐 끼치는 일을 세상에서 제일 싫어한다. 특히 부모님 앞에서는 어두운 마음을 절대 내색하지 않는다. 나 하나만 보고 유럽에 ‘갇혀’ 사시는 두 분 앞에서 투덜거리는 짓이야말로 최악의 불효라고 생각한다. 내 안에 쌓인 ‘힘들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상대가 곧 친구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나의 불평을 많이 들어준 친구는 바로 친형이다. 우리 형은 말을 정말 재미있게 한다. 내가 아무리 징징거려도 재미있게 받아쳐서 동생의 마음을 금방 풀어준다. 어릴 때부터 혹독한 훈련을 함께 버틴 형은 내 인생에서 없어선 안 될 친구이자 믿을 구석이다.”
“가끔 은퇴 후의 생활을 상상해 본다. 진로 고민이 아니라 아주 소소하게 해보고 싶은 일들이 있다. 제일 해보고 싶은 일은 한국에서 유럽 축구 중계와 ‘치맥’ 즐기기. 저녁에 알람을 맞춰 놓고 일찍 자는 거다. 챔피언스리그 경기 시간에 맞춰 일어나서 스마트폰 앱으로 ‘치맥’을 주문한다. TV를 켜고 소파에 기대서 맛있는 치킨과 함께 맥주를 한 잔 마시면서 축구를 본다. 내가 좋아하는 축구를 실컷 보는 게 내 꿈이다. 은퇴했으니까 훈련이나 경기를 준비할 필요도 없고 까마득한 후배들이 뛰는 챔피언스리그 경기를 시청하면 정말 재미있을 것 같다. ‘야~ 옛날에 내가 뛸 때랑 많이 달라졌네~’ 하면서.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라면 더 재미있을 것 같다. 그나저나 그 친구는 축구를 좋아하려나…”
“아시아 최종 예산부터 러시아 월드컵 독일전의 종료 휘슬이 울리기 전까지 대표팀은 버티고 또 버텼다. 처절했다고 해도 좋을 만큼 힘들었다. 독일전을 앞두고 (장)현수 형은 팀에 해가 된다면서 경기에서 빼 달라고 감독님에게 부탁까지 했다. 일생일대의 월드컵 경기 출전을 스스로 포기하려는 축구선수의 심정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지난여름 한국에서 시작한 나의 여정은 오스트리아, 러시아, 한국, 영국, 미국, 영국을 거쳐 인도네시아로 이어졌다. 내 이동 거리를 정리한 언론 기사를 보고서야 나도 ‘아, 많이도 돌아다녔구나’라고 실감했다. 힘들었을까? 당연히 힘들다. 10시간 비행하는 구간을 한 번이라도 타 보신 분이라면 장거리 이동이 얼마나 지치는 일인지 아실 것이다. 하지만 이를 경기력 저하의 핑곗거리로 삼고 싶지는 않다. 장거리 이동은 유럽에서 뛰는 타 대륙 선수에게 일상다반사다. 리오넬 메시, 네이마르, 루이스 수아레스, 알렉시스 산체스 등 남미의 스타플레이어들도 나처럼 대륙과 대륙을 넘나들어야 한다. 남미 스타들이 피곤하다며 투덜거렸다는 소리를 나는 들어 본 적이 없다.”
“고백할 게 있다. 아시안게임에서 귀국한 날 금메달 동지들이 다 함께 모여 저녁을 먹었다. 각자 소속팀으로 흩어지기 전에 한 번 더 뭉치기 위한 자리였다. 파울루 벤투 신임 감독님의 첫 A대표팀 소집 멤버들은 바로 다음 날 파주 트레이닝센터로 입소할 예정이었다. 인도네시아에서 천당과 지옥을 오가면서 함께 금메달을 따낸 이야기들은 길게 길게 이어졌다. 다들 시즌 중이었지만 이날만큼은 축배가 빠질 수 없었다. 서울의 이모 집에서 하룻밤을 잔 뒤에 대표팀에 합류했다.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왔다. 불같이 화를 내셨다. “국가대표팀 새 감독님을 뵈러 가기 전날 술을 마시는 게 제정신이냐? 네가 이따위로 할 거면 이제 각자 갈 길 찾아 떠나는 게 낫겠다. 아빠는 북극이든 어디든 알아서 먹고살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라.” 아버지의 불같은 성격이야 하루 이틀이 아니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말씀하신 적은 없었다. 살면서 제일 크게 혼난 날이 아니었나 싶다. 대표팀 신임 감독님에게 대한 예의도 중요했겠지만, 아마 금메달을 땄다고 들뜨지 말라는 메시지가 더 컸던 것 같다. 아버지는 항상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당신만의 방식으로 내 머릿속을 환기하신다. 우쭐하지 말고, 항상 겸손하고, 반대로 너무 풀이 죽지도 말아야 한다. 스마트폰에 대고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면서 벤투호의 첫날이 시작되었다.”
“맨유전을 끝내자마자 나는 경기장에서 곧바로 공항으로 이동해 두바이행 비행기를 탔다. 대표팀 동료들이 싸우고 있는 아시안컵 현장으로 가야 했다. 벤투 감독님은 나를 주장으로 선택했다. 사실 처음에는 머뭇거렸다. 선배 주장들의 희생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알았기 때문이다. 나 혼자 잘 뛰면 그만인 상황이 아니었다. 주장은 팀 내 모든 선수를 챙겨야 한다. 큰 스트레스였다. 표정이 조금이라도 어두운 친구가 있으면 주장이 나서서 사정을 들어줘야 한다. 고민하는 내게 두리 선배가 연락을 했다. “지금 여기서 네가 못 한다고 하면 누군가 주장 완장을 차야 하잖아. 그 친구가 받게 될 부담을 생각해 봐. 성용이가 못 한대. 흥민이도 못 한대. 그렇게 주장 완장을 받게 될 거란 말이야. 솔직히 지금 너 아니면 그런 부담감을 견딜 친구가 별로 없어.” 맞는 말이다. 지성이 형도, 성용이 형도 ‘나는 힘드니까 주장 같은 거 안 한다’라면서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다. 나도 대표팀에서 이기심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설상가상 주장이라는 책임감이 족쇄처럼 따라다녔다. 슈팅 타이밍에도 무의식적으로 주위에 있는 동료를 찾느라 기회를 날리기 일쑤였다. 심지어 내가 더 좋은 위치에 있으면서도 패스를 선택했다. 플레이의 폭이 점점 좁아졌다. 토트넘에서는 얼마든지 골문을 노릴 자유가 있지만, 주장 완장을 차고 뛰는 대표팀 경기는 달랐다. 내가 직접 해결하기보다 동료에게 기회를 만들어 줘야 한다는 강박에 나도 모르게 시달렸다. 주장 완장을 차면 찰수록 지성이 형과 성용이 형이 얼마나 대단한 리더였는지를 절감했다.”
“도대체 내가 어떻게 이런 시즌을 보낼 수 있었을까? 우선 평소 자기 관리의 선물인 것 같다. 10개월에 달하는 시즌은 온전히 축구의 몫이다. 훈련에서 돌아오면 그때부터 내일 훈련의 준비를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지낸다. 그라운드 안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밖에서 에너지 소모를 최대한 줄인다. 이는 몸과 마음 모두 해당한다. 얼마 전 내가 영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결혼은 은퇴 후”라고 말한 것이 큰 화제가 된 걸로 안다. 물론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리오넬 메시처럼 가정을 꾸리면서도 세계 최고의 자리를 유지하는 선수도 많다. 사람마다 가진 능력의 차이를 부정하기 어렵다. 천재성을 타고나지 못한 나는 24시간을 통째로 축구에 들이부어야 지금의 경기력을 유지할 수 있다. 축구를 잘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축구만 해야 한다. 런던에도 유혹은 얼마든지 있다. 프리미어리그 선수는 본인만 원하면 얼마든지 화려한 삶을 만끽할 수 있다. 젊고 돈 많고 평소 시간도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를 망각하지 않는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축구를 잘하고 싶은 마음이 가장 크다. 경기력 향상을 위해서라면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는다. 재미없는 삶이다. 정말 따분하기 그지없다. 그래도 감수한다. 그렇게 해서 매 시즌 프리미어리그 우승에 도전할 수 있다면, ‘올해의 선수’로 선정될 수 있다면, ‘올해의 골’을 넣을 수 있다면, 팬들을 즐겁게 해 줄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축구 24시간’의 생활을 받아들이고 싶다. UEF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뛸 수 있다면 나는 얼마든지 수도승으로 살아갈 수 있다.”
Epilogue

2019년의 손흥민은 그럴듯해 보이는 사람이에요. 프리미어리그의 인기 팀에서 뛰는 프로 축구선수죠. UEFA 챔피언스리그, FIFA 월드컵, AFC 아시안컵 등 축구 선수라면 누구나 꿈꾸는 무대에서 뛰어 봤어요. 더 큰 꿈을 꿔도 될 만큼 젊죠. 남들이 보기에 이런 제 모습이 화려해 보일지 몰라요. 하지만 그것은 지금 이 순간의 겉모습입니다. 힘들었던 과거와 뒤에서 이루어지는 노력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죠. 지금까지 어려웠던 날이 훨씬 많았어요. 좌절하며 눈물을 흘린 순간도 많았고요. 사실 지금도 인내하고 또 인내하며 살고 있어요.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죠. 제가 과분한 TV 다큐멘터리 촬영을 하고 이렇게 책을 내기로 한 이유이기도 해요. 지금 이 자리에 오기까지 필요했던 저의 뒷모습을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제가 어릴 적 우리 가족은 가난했어요. 또래 아이들에게는 일상적이었을 게임이나 여행, 놀거리들을 저는 별로 해본 기억이 없어요. 축구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을 때 아버지께서 저를 데리고 다녀야 한다며 소형 중고차를 한 대 구해 오셨어요. 120만 원을 주셨다고 하더군요. 비가 오면 창문 틈으로 빗물이 줄줄 샜어요. 그래도 자가용이 생겼다며 우리 가족은 좋아했죠.

세상은 정말 차갑더라고요. 주위에서 아버지가 ‘똥차’를 몰고 다닌다며 손가락질을 했대요. 아버지께는 그게 마음의 상처로 남아 있어요. 지금 아버지의 자동차는 허세가 아니라 과거의 멸시를 잊고 싶은 마음의 표현이라고 생각해요. 독일 연수 시절 저도 참 힘들게 지냈어요. 한국 식당에 갈 돈이 없어 허기를 꾹꾹 참았어요. 아버지가 독일까지 날아오셔도 딱히 풍족하게 생활하진 못했어요. 저는 아직 자식을 키워 본 적이 없지만, 형편이 어려워서 자식에게 해줄 게 별로 없는 부모의 심정은 정말 말도 못하게 괴로웠을 겁니다. 제 인생에서 공짜로 얻은 건 하나도 없었어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혹독하게 훈련했어요. 다른 아이들이 신나게 놀 때 저는 매일 리프팅으로 볼을 떨어트리지 않고 운동장을 세 바퀴씩 돌았죠. 프로 첫 시즌을 끝내고 매일 슈팅을 1천 개씩 때렸고요.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려고 비는 시간에는 최대한 휴식을 취해요. 드리블, 슈팅, 컨디션 유지, 부상 방지 등은 전부 죽어라 노력해서 얻은 결과물이라고 믿어요. ‘와, 정말 슈팅이 대단하군요’라는 칭찬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요.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내가 이렇게 슛을 때리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하는 생각도 들어요. 독일어와 영어도 마찬가지예요. 창피함을 무릅쓰고 현지 아이들에게 계속 물어보며 공부했어요. 단어를 외우고 문장을 익히고 동료들의 인터뷰를 보면서 따라 해보고 그랬어요. 그런 과정이 없었으면 다른 나라의 언어를 빠른 시간 내로 습득하는 건 불가능했을 거예요.

어제 값을 치른 대가를 오늘 받고, 내일 받을 대가를 위해서 오늘 먼저 값을 치릅니다. 후불은 없죠.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리오넬 메시가 왜 하늘 위로 올라갈 수 있었을까요? 그만큼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지금도 내려오지 않고 계속 날고 있으니 여전히 노력하고 있다는 뜻이겠죠. 그런 노력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이에요. 지금 저도 자제하고 훈련하면서 꿈을 향해 달리고 있어요. 저는 축구를 좋아해요. 정말 많이 좋아해요. 요즘 말로 ‘축빠’, ‘덕후’라고 하면 딱 맞아요. 축구가 재미있어서 시작했고, 지금도 더 잘하고 싶어서 계속 노력해요. ‘축빠’의 심리가 뭔지 아세요? 세상 모든 사람이 축구를 좋아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거죠. 이렇게 재미있는 축구를 더 많은 사람과 함께 즐겼으면 좋겠어요. 독일의 분데스리가, 잉글랜드의 프리미어리그처럼 대한민국에서 K리그가 일상으로 자리 잡는 날을 상상하곤 해요. 다들 주말에 K리그를 보러 가서 응원하고, 월요일에 모여 K리그를 이야기하는 광경이죠. 물론 지금도 국가대표팀을 사랑해 주셔서 너무 감사드려요. 꾸지람을 들을 때도 많지만 최선을 다하는 대표팀 선수들을 응원해 주시는 국민들이 훨씬 많다는 사실을 잘 알아요. 그런 사랑과 관심, 응원이 매 주말마다 동네에서 벌어지는 축구 현장으로 퍼지면 정말 행복할 것 같아요. 작은 TV 화면이 아니라 뻥 뚫린 경기장에서 신나게 축구를 즐기면서 웃을 수 있는 대한민국을 꿈꿔요. 제 다큐멘터리를 보고, 이 책을 읽고 축구에 관심을 가져 주시는 팬이 한 분이라도 더 생기면 저는 정말 행복할 것 같아요. 그렇게 해 주실 거죠? 미리 감사드려요!” - 런던에서, 손흥민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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